편집자로 그림책을 만들었을 때, 60권 정도의 기획 그림책을 진행한 적이 있다. 원고 작업을 마친 뒤, 원고와 잘 어울리는 그림 작가들을 찾았다. 경력이 많은 작가부터 신인 작가까지 파트너처럼 일할 수 있는 작가들을 섭외했다. 프로젝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계약을 위해 미팅을 진행했고, 그때 B를 만났다. B는 담당자들의 말을 꼼꼼하게 메모했다.
"작가님, 저희가 작가님의 포트폴리오를 보았는데요, 작가님이 그린 삼색 고양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담당디자이너와 저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어요. 작가님이 맡은 책에 고양이들이 세 장면 정도 나와요. 그 느낌을 잘 살려서 그려주시면 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B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B는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이 하고 싶어 아카데미에서 출판 일러스트를 배웠다고 했다. B는 열정적이었으며 성실했다. 마감 시간보다 빨리 썸네일 스케치를 보내줬고, 최신 자료를 공유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본 작업을 위한 스케치를 받았을 때, 담당디자이너와 나는 낙담했다. 작가가 얼마나 고민하며 그렸을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여러 번 피드백을 주고받았지만, B의 그림은 점점 산으로 갔다.
프로젝트 마감일은 가까이 오는데, B의 그림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나서 피드백 내용을 다시 한 번 설명해야 할까. 이대로 이 계약을 유지하는 게 맞을까. 나는 마지막으로 B에게 미팅을 요청했다. B가 회의실에 풀죽은 아이처럼 앉아 있었다. "작가님, 오셨어요?" B에게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B가 왈칵 울음을 쏟아내었다.
"죄송해요. 힘들게 해드려서……." B는 더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럼에도 눈이 금세 벌게졌다.
나는 B가 왜 울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당장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서 오는 답답함과 조급함도 이유였겠지만, 그림만을 위해 달려왔던 시간과 앞으로 내가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절망이 겹쳐졌다는 걸.
"작가님, 울지 마세요. 우리 어떻게든 완성해 봐요."
그 뒤로 몇 번의 피드백과 수정을 통해 무사히 B의 이름이 실린 책을 출판했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마음이 괜히 무거웠다.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고양이를 꽤나 잘 그렸었는데.
몇 년 뒤, 우연히 딸아이와 문구점에 갔다가 어딘지 익숙한 고양이 그림들을 발견했다. "엄마 이거 알아? 이 삼색 고양이들 엄청 유명해. 나 이거 진짜 갖고 싶었어." '설마 이거 B가 그린 고양이들일까. '나는 제품 뒤에 적혀있는 계정을 검색해 보았다. 맞았다! 이 삼색 고양이들은 그녀가 그린 고양이들이다. B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볼펜, 지우개, 공책과 가방을 만들었다. 그녀의 고양이 그림은 여전히 사랑스럽고 앙증맞았다.
딸아이와 나는 B의 제품을 가득 사서 문구점을 나왔다. 다행이다. 그녀가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딸아이에게 B에 대해 이야기해줘야겠다. 계속 무언가를 하는 사람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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