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군밤 굽는 냄새가
골목길을 휘젓는다.
코가 발름거리자
목젖도 날름날름
오백 원
백동전 물고
생쥐들도 줄 서겠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박방희의 동시 「군밤」을 읽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요즘 군밤이 군것질 거리로 큰 환영을 못 받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생밤이든 군밤이든 삶은 밤이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없어서 못 먹는 훌륭한 주전부리였다. 먹을 게 귀하던 당시에는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나 구수한 밤 몇 톨을 맛 볼 수 있었다.
밤은 밤나무에서 열리는 과실이다. 옛날에는 밤은 가난한 사람들의 요긴한 양식이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밤은 구황식품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세종실록』에 보면 '흉년에 밤과 상수리를 주워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산과 들을 불태우는 일을 금해야 한다'고 나와 있어 밤이 긴요한 비상식량으로 취급됐다.

대구 범어공원 자락의 능성구씨(綾城具氏) 도원수공파(都元帥公派) 철원부사공(鐵原府使公) 종회의 선산 인근에 있는 밤나무.
◆원효 탄생 설화
신라의 성현으로 추앙받는 원효(元曉)는 당시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 율곡의 밤나무 아래서 탄생했다. 역시 경산 출신인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 제4권 「의해」(義解)편 「원효불기」(元曉不羈·원효는 모든 일에 얽매임이 없다)에 탄생 일화가 나온다. 만삭인 어머니가 들에 나갔다가 산기(産氣)가 있어 급히 집으로 돌아오다 미처 귀가하지 못하고 길옆의 큰 밤나무 아래서 아버지의 윗도리로 가려 놓고 원효를 순산했다. 그 밤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고 하고 밤나무에서 열린 밤을 사라율(裟羅栗)이라고 불렀다. 사라율은 굵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한 톨이 스님의 밥그릇인 바리때에 가득 찰 정도였다. 원효가 출가한 뒤 그가 태어난 자리에 「사라사」(裟羅寺)라는 절을 세웠는데 지금 경산시 자인면에 있는 제석사 자리라고 전해진다.
밤은 제사에 올리는 과일 중에서 대추 다음에 위치할 정도로 소중한 제물(祭物)이다. 가시로 무장한 밤송이 안에 보통 밤알이 세 개 들어있는데 후손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즉 3정승을 한 집안에서 배출하라는 의미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참나뭇과의 도토리는 싹이 틀 때 껍질을 머리에 쓰고 나지만 같은 문중임에도 밤은 밤톨 껍질을 땅속에 두고 싹만 올라온다. 껍질은 오랫동안 땅속에서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는데 이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 '조상숭배'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까닭에 조선시대 나라의 제사를 관장하던 봉상시(奉常寺)에서는 신주를 반드시 밤나무로 만들었다. 사대부들 조상 위패의 재료도 밤나무다.

밤송이가 벌어진 모습.
◆밤나무 재배 장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밤나무 키우기를 장려했다. 조선시대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밤나무에 대한 규정을 보면 "장원서(掌苑署·왕궁의 꽃과 과목을 담당하던 관청)의 과수원은 국가 공무원이 맡아서 나무를 심고 접붙이기도 하되 나무의 수효를 장부에 기록하고 기록한 내용을 본조(本曹)에 통첩하도록 한다. 만일 관리와 지도를 잘못하면 그 죄를 다스린다"는 기록으로 미뤄보아 엄중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성종 때 나온 『속대전』(續大典)에도 '밤나무를 심어 밤을 생산하는 농민은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부역을 면제시켜준다'고 규정했을 정도로 국가에서 밤나무를 중시했다.
밤나무 목재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며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제사상이나 기구 제작에 많이 쓰였다. 수요가 늘어나자 밤나무를 생산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나라에서 벌채를 금지하는 '율목봉산'(栗木封山)으로 지정해 조선시대에 이미 '입산금지' 제도를 실시했다.
서거정의 『사가집』(四佳集)에 나오는 「밀양십경」의 제3경 「율도추연」(栗島秋烟·밤섬의 가을 연기)에는 밤나무 꽃을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栗花如雪香浮浮(율화여설향부부·밤나무 꽃이 피어 눈 온 것 같은데 향기가 진동하고)
壘壘結子如繁星(누루결자여번성·밤송이가 달리고 또 달려서 숱한 별들이 내려앉은 것 같다)…'

밤나무 꽃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초에 밤꽃이 핀다.
밤꽃은 좋은 꿀을 딸 수 있는 밀원이다. 밤꽃은 향기롭다기보다는 독특한 냄새가 난다. 이를 호사가들은 '양향'(陽香)이라 불렀고 율곡 이이와 연결시켜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여러 곳에 전승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너도밤나무는 작은 세모꼴의 열매가 열리는 나무로 밤나무와는 참나뭇과의 한 문중쯤으로 여겨지며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특산종이다. 울릉도 성인봉 꼭대기의 원시림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어 참나뭇과 문중에서는 일찍이 글로벌 시대를 살아온 나무다.
비슷한 이름을 가진 나도밤나무는 밤나무와는 옷깃도 스치지 않는 족보상으로 아무 관련 없는 나무다. 콩만 한 빨간 열매가 열리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밤나무와 나도밤나무의 관계를 '김철수와 이철수' 처럼 성은 다르고 그저 이름만 같다고나 할까.
◆경상도읍지의 밤나무 숲
조선후기에 발간된 『경상도읍지』에는 유명한 밤나무 숲이 기록돼 있다. 경북 고령의 밤나무 숲, 청도의 상지율림(上枝栗林) 하지율림(下枝栗林), 상주의 밤나무 숲이 유명하다고 소개했다. 특히 상주의 밤나무 숲은 서쪽 지형이 지네 같아서 지네의 독(毒)을 누르기 위해 마주보는 읍의 동쪽에 밤나무 숲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허균이 쓴 음식 평가서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상주(尙州)에서 나는 밤은 작은데 껍질이 저절로 벗겨져 속칭 겉밤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을 만큼 상주 밤나무는 역사가 깊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온계종택(溫溪宗宅) 앞길에 서 있는 500년 된 밤나무도 풍수지리의 지네와 관계 깊다. 나무 둘레는 5~6m 높이는 12m다. 영지산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 앞산이 지네 모양이어서 나쁜 기운을 막으려고 밤나무를 심어 키웠다. 퇴계 이황의 조부 살림집인 노송정 종택, 이황의 친형인 온계 이해(李瀣)의 살림집인 삼백당 종택 등을 보호하기 위해서 마을 곳곳에 밤나무를 심고 가꿨다. 밤나무들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사라졌지만 이해가 손수 심고 키운 나무로 알려진 밤나무 한 그루가 500여년 세월 동안 거센 풍파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올해도 밤이 열렸는데 밤송이에는 작은 밤톨이 한 개 혹은 두 개씩 들어있는 토종밤의 전형이라고 한다.
대구 금호강 강변의 밤나무 숲도 유명했다. 시인 백기만이 잡지 『별건곤』에 "동촌에는 좋은 밤나무 숲[율림·栗林]이 있어 가을에 밤을 줍는[습율·拾栗] 재미를 볼 수 있으니 각 학교의 가을 소풍지[추기 원족지·秋期 遠足地]로도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더구나 작년부터는 버스가 매일 수차례 왕복하게 된 까닭에 나날이 번창하여 가는 상태에 있다"고 기고한 걸 보면 일제강점기까지 밤나무 밭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모양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와 당랑박선(螳螂搏蟬)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하거나, 사기나 협잡으로 다른 사람을 농락하는 행위를 흔히 조삼모사(朝三暮四)라고 말한다. 원숭이 먹이인 밤에서 이 고사성어가 생겼다. 옛날 원숭이를 훈련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산밤을 나눠주면서 "오늘 아침부터는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씩 주겠다" 했더니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래서 "아침에 네 알 저녁에 세 알씩 주겠다" 했더니 원숭이들 모두가 기뻐했다는 것이다.
밤나무 이야기와는 결이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밤나무 숲에서 장자가 수난을 당한 이야기가 『장자』의 「산목」(山木)에 나온다. 매미를 덮치는 데만 정신이 팔린 사마귀, '당랑박선'(螳螂搏蟬)은 바로 밤나무 숲에서 유래했다. 어느 날 조릉(雕陵)의 울타리 근처에서 장자가 거닐고 있는데 날개폭이 일곱 자나 되고 눈 둘레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가 그의 이마를 스치고 밤나무 숲에 날아가 앉았다. 장자는 빨리 걸어가서 활을 잡고 새를 겨누었다. 숲에는 매미 한 마리가 밤나무 가지에 붙어서 자기의 위험한 처지조차 잊고 울고 있었다. 사마귀 한 마리는 매미를 잡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마귀를 이상한 까치가 노리고 있고, 까치는 사마귀를 덮치려고 정신이 팔려 장자가 활을 겨누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를 깨달은 장자가 활을 버리고 도망치듯 되돌아 나오는데, 밤나무 숲 주인이 쫓아 와서 심한 욕설을 했다. 장자마저도 밤나무 숲 주인이 뒤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장자는 밤나무 숲 주인에게 치욕을 당한 일을 불쾌하게 여겨 석 달이나 두문불출했다. 사물의 이(利)와 해(害)는 서로를 불러들이는데, 사람은 눈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 뒤에 닥칠 화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다. '대장동 의혹' 불길이 정치판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지금이 당랑박선의 형국이다.
편집부장 chungham@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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