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슈퍼태풍 하이옌이 필리핀을 휩쓸어 6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나는 마닐라에서 아동권익보호를 담당하고 있었다. 긴급구호는 내 일이 아니었으나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업무 분장도 함께 무너졌다.
물, 담요, 말린 망고, 손전등 따위가 들어 있는 '생존배낭'을 메고 동료 넷과 로하스(Roxas)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피해 상황을 파악해 보고하는 게 임무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로하스에 도착했다. 전력 공급이 끊긴 도시는 섬뜩하리만큼 고요한 암흑에 덮여 있었다. 새벽까지 잠을 뒤척였다. 고요의 정체가 수많은 삶의 소멸이 아니길 바랐다.
다행히 로하스의 인명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삶의 터전은 처참히 붕괴돼 있었다. 지붕은 모두 날아간 채 낡고 허물어진 벽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미로 같았다. 닭뼈튀김에 미지근한 콜라로 끼니를 이었다. 주민의 사정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며칠 뒤, 로하스 출신 동료의 친척이 저녁식사에 일행을 초대했다. 닭뼈튀김이나 스팸 주먹밥 정도를 예상하고 차에 올랐다. 역한 체취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변기에 부을 물도 없는 상황에서 샤워는 언감생심이었다.
전기 모터 돌아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환하게 불 밝힌 저택이 보였다. 민가에 발전기가 있다니! 발전기가 돌아가는 곳은 시청과 도청밖에 없는 줄 알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치장한 성모 마리아상이 샹들리에 아래로 일행을 내려보았다. 주인은 발목까지 오는 파티 드레스를 입고 일행을 맞이했다.
주인은 와인과 위스키, 콜라를 먼저 내왔다. 차가운 병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주인의 딸 내외가 와인 잔을 돌리며 세련된 영어로 사교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일행은 허겁지겁 음료를 들이켜기 바빴다. 이어지는 뷔페도 마찬가지였다. 한입 크기로 우아하게 썰어 오물거리는 주인 가족과 다르게 접시 끝까지 음식을 수북이 쌓은 일행은 식사 예절 따윈 모르고 자란 사람처럼 게걸스레 포식했다. 소고기와 신선한 조개찜의 등장은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에 가까웠다.
두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주인 가족의 말이 귀에 들어왔다. 매년 미국 보스턴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마라톤에 참여하는 게 가문의 전통이라고 했다.
식사가 끝난 뒤 주인은 거실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쏴아아아, 파도 소리가 일행을 휘감는가 싶더니 거실은 이내 말리부의 고급 리조트처럼 변했다.
"파도 소리만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어요."
선베드에 누운 주인이 말했다. 일행도 잠시 주인 곁에 앉았으나, 며칠 전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바다를 편안하게 관조하려는 이는 없었다.
일행을 태운 차는 어둠이 깔린 대지를 다시 가로질렀다. 세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어둠이 퍽 낯설었다. 가문의 땅을 소작하는 농민들에게 비상식량을 얼마간 나눠줄 거란 주인의 말이 검은 평야 위로 겹쳐 떠올랐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가진 자와 지붕을 잃은 자가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세상. 불현듯 기후위기 속 미래 디스토피아의 편린을 엿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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