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떠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블랙호크 헬기에 이미 죽은 걸로 추정되는 사람을 매단 채 상공을 나는 사진을 봤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이런 일이 같은 하늘 아래 누군가에게는 버젓이 일어나다니.
예전에 탈북민 진료를 봤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진료를 봤던 분은 모녀로, 두 분 다 성인이었는데 키가 150㎝도 안돼 보였다. 진료 중에, 탈북하다가 붙잡혀서 맞았던 얘기, 굶주렸던 얘기가 나왔는데 그걸 듣는 내 표정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었나 보다. 갑자기 말을 중단하고 고개를 떨구시는데 어찌나 죄송하던지. 변명하기도 힘든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그게 벌써 20년전 얘기인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원피스를 입었다고 죽임을 당하고, 종교가 다르다고 잡혀가고, 우리 집 거북이한테도 넘쳐나는 물이 없어서 아기가 병에 걸린다. 똑같은 눈코입을 가진 사람인데 태어나 보니 내 부모의 계급이, 그것도 사람이 임의로 정한 계급이 천해서 학교에 갈 수 없다. 그런데 이건 그 사람이 뭘 잘못해서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아마존 원주민으로 태어났다면, 할례를 하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의사로 사는 똑같은 손수민도 거기에선 학교에 못가고 누군가의 재산으로 사는 삶을 받아들여야 했을 거다. 나는 내가 누리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원래 당연한 건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그렇게 태어났다면 나의 당연한 권리는 절대 당연하지 않은 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친구가 내게 왜 종이 신문을, 그것도 여러 개 받아보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종이 신문을 보는 이유는 인터넷 검색 상위 순위에 올라온, 걸러진 뉴스만 보고 싶지 않아서다.
그렇다고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죽은 뒤에도 헬기에 매달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신을 거두어 드릴 수도 없고, 인형놀이를 할 12살 나이에 30살도 더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야 하는 아이의 결혼을 무효로 할 수도, 불가촉천민이라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가는 친구들에게 당장 화장실을 지어줄 수도 없지만,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눈 크게 뜨고 같은 하늘아래 어떤 무자비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게, 그 불합리를 바꾸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건 불공정하다고, 상식이 아니라고, 그러니 그만하라고 얘기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꾸자꾸 많아지고, 바뀐 생각이 상식이 되면, 그런 비상식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의 상식과 다른 상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이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때, 어느 쪽이든 세상은 좀 더 말이 되는 쪽으로 변화할 거라 생각한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언론인에게 돌아간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서, 블랙호크에 매달린 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이름모를 그 분의 명복을 빈다.
손수민 영남대병원 재활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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