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가 읽은 책] 오늘 커피는 제가 사겠습니다

울프 일기/ 버지니아 울프/ 박희진 옮김/ 솔 펴냄/ 2019년

짙은 가을 빨간 감이 익어가고 있다. 제공 정화섭
짙은 가을 빨간 감이 익어가고 있다. 제공 정화섭

우리는 어떤 빛깔로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가. 민낯의 내면세계를 엿본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다. 이 책은 1918년(36세)부터 1941년(59세)까지 울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의 일기이다. 단어 하나의 무게마저 손가락에 느끼며 쓴, 고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내 일기가 어떤 모양이기를 바라는가. "고색창연한 깊숙한 책상이나 넉넉한 가방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허섭스레기같은 것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도 던져 넣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30쪽) 하지만 의식의 흐름 속에는 언제나 변덕스런 마음이 기어가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살아있는 삶, 이승임에 괴로워한다.

죽음은 늘 서둘러 다가오고 저녁노을은 뒤늦은 회한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울프는 막상 쓰기 시작하면 보이지 않는 뿌리도 내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매일 아침 한 시간 동안 내 안테나로 하늘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대개 열두 시 반까지 열심히 힘들이지 않고 글을 쓴다는 사실이다."(171쪽) 써가면서 스스로의 풍부함에 위안을 얻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얻으며, 작품의 결말을 구상했다.

인생이란 얼마나 빠르고, 맹렬하고, 당당하게 지나가 버리고 마는가. 유일하게 흥분되는 삶은 상상속의 삶이라 했다. 울프는 모든 것이 무가치해 보이고 자살하고 싶다고 느낄 때는 등 뒤의 인물들을 소환했다. 프루스트와 괴테의 전기를 읽고, 도스토예프스키의 표현을 빌리기도 하며, 제인 오스틴과 입센,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 등이 자극제가 되길 원했다.

"내가 새침데기이고 또 염탐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더욱 대담하게 살자. 그러나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며 글을 쓰지는 말 것."(381쪽) 내 그물을 넓게 펴야 한다. '파도'와 '등대'를 쓰고 비참했던 사실이 오늘은 괜찮은 것처럼, 세상일이란 오르락내리락 하느님만이 진실을 아신다고 믿으며 위로를 얻었다.

젖은 붓으로 손질하듯 하나의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쓴 '댈러웨이 부인'. 생활의 틈새가 아니라 생각의 틈새로 매일 아침 왕성하게 쓴 '3기니'. 강렬한 감정으로 쓴 책이 표면에 잔물결도 일으키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 만약 돈이 생기면 종신 연금 증서를 살까. 인간 울프의 생생한 면모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면모까지 볼 수 있었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딸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 역사적 사회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일기 속에는 1913년(30세) 첫 작품 '출항'에서 1941년(58세) 마지막 소설 『막간』까지의 작품에 대한 관찰과 고뇌가 있다. 읽었던 책인데도 그 시대의 상황들을 접하면 다시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죽음은 조용한 호수에 달이 잠기는 것이라 했던가. "나의 견해. 그의 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 그리고 그의 책들." 울프의 일기는 마음의 상처에 발라주는 연고와 같다. 달팽이 껍질처럼 가벼운 영혼의 자유를 준다. 옳고 그름과 그럴 만한 가치에 대해 질문하지 않아도 좋다.

정화섭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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