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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지음/ 문학동네 펴냄

대구 신천둔치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징검다리 위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대구 신천둔치의 동쪽과 서쪽을 잇는 징검다리 위로 시민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정지돈 작가가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냈다.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산책을 소재로 산문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출판사(문학동네) 측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라 했다. 비밀 프로젝트처럼 신비주의 콘셉트로 출간된 건 아니다. 지난해 2월 웹진 형태로 시작한 '주간 문학동네'에 첫선을 보였다. 같은 해 9월까지 연재했다. 매주 월요일 연재하던 총 23편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다.

박태원(1909∼1986)의 작품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년 作)을 21세기 버전 에세이로 썼다고 한다. 그렇지만 걷기 좋은 산책길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외려 상쾌할 것만 같은 산책의 이미지를 팩트 폭격으로 깬다. '산책의 아이러니'라며 이렇게 말이다. "일하기 전에 산책하는 것은 낭만적인 일이다. 상상 속에서는 그렇다. 실제로는 산책을 하고 나면 일을 다 한 느낌이다. 피로가 몰려오고 잠깐 눕고 싶다. 누우면 자고 싶고."

부제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고 축약해도 무리는 없다. 산책을 즐기면 뛰기로 업그레이드하는 경우가 적잖은데, 작가는 무조건 걷는다. 이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를 배우고 나면 반어, 아이러니, 유머, 농담, 현학적인 표현부터 줄임말까지 모든 게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도시를 가로지르고 표류하며, 발견하고 점거하고 걷기 위해서는 도시를 배워야 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발화-보행해야 한다."

서울 중구 청계천에서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산책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중구 청계천에서 점심을 마친 직장인들이 산책하고 있다. 연합뉴스

소설에서 팩트와 픽션을 혼합하고 버무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작가는 산문집에서만큼은 픽션의 비율을 현저히 낮춘다. (하긴 산문집에 픽션이 비집고 들어가는 게 더 어색하다. 다만 작가는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 그러나 약간의 과장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지를 남겼다.) 철저히 실명제에 근거한, 지금은 성폭력으로 더 유명해진 운동권 출신 유명 정치인만큼은 실명으로 거론하지 않은, 실제 사례 위주의 서술이다.

장 자크 루소의 미완성 유작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실체를 비롯해 세계적 지성들이 도시와 산책에 대해 한 말이 산문집에 듬뿍 담겼다. 그러나 말초적 자극처럼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오한기 소설가, 이상우 소설가, 금정연 평론가다. 이들이 함께 걸으며, 또는 걷다 카페에서 쉬면서,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앉아 나눈 대화다. 박솔뫼 소설가도 우정출연하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은 부산을 돌아다니는 '미래 산책 연습'이다.

단풍으로 물든 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 산책로. 연합뉴스
단풍으로 물든 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 산책로. 연합뉴스

산책하며 생각한 것들 못지않게 작가가 쓴 여담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사이다 직설'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라는 착각이다"는 문장에서는 만세를 부를 뻔했다.

작가는 특히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으로 '경험'을 든다. 그는 "사람들이 발로 뛰는 경험이라는 관념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며 경험을 보물처럼 여기는 걸 경계한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경험은 백해무익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 표현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혹은 "가봐서 아는데".

엄밀히 말하면 해본 만큼만 알고,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해본 만큼', '살아본 만큼', '안다고 믿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작품이나 사태를 파악할 때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그래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를 속박한다는 작가의 주장에서는 속이 다 후련해질 정도다. "당신이 만약 작품 또는 사태에 반응하고 그 순간의 맥락에서 충실하게 접근했다면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예술작품의 감상에 도우미 기능으로 충분하니 현학적인 평론은 자제해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금정연 평론가와 대화하며 인용한 조지 오웰의 말도 뼈를 때린다. 조지 오웰은 '어느 서평자의 고백'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일 것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산책이라는 소재와 연관된, 참고할 만한 연구가 마지막 페이지에 실렸다. 2017년 스탠퍼드 연구진이 '네이처'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111개국을 조사했는데 한국인의 하루 평균 걸음은 5천755걸음이었다고 한다. 1위는 홍콩으로 6천880걸음을 걷는다고 한다.

대구 출신의 정지돈 작가는 2013년. '눈먼 부엉이'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2016년 '창백한 말'로 문지문학상을 받았다. 272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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