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백년지대계, 오년지소계

채정민 사회부 차장
채정민 사회부 차장

항공기 운항이 통제되고 출근 시간이 늦춰진다. 경찰은 비상 근무 체제에 들어간다. 학교 수업도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날의 대한민국 풍경이다. 이때만큼은 온 나라의 관심이 수능시험에 쏠린다. 이러니 설, 추석과 함께 민족 3대 명절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처럼 수능시험에 매달리는 건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어서다. 잘못된 생각이라 지적하기도 그렇다. 여전히 대학 간판은 사회에 진출했을 때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게 현실이다. 실패하면 다시 서기 쉽지 않은 사회에서 현실에 당당히 맞서라 얘기하긴 어렵다.

특히 각 계층이나 세력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 교육 현장, 교육 정책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욕망을 투영, 자신이 이루지 못한 걸 손에 쥐길 기대한다. 그러려고 돈을 쏟아붓는다. 내 자식이 먼저고, 내 자식에게 유리한 게 가장 중요하다. 교육 정책을 얘기할 때 객관적이고 논리적이길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게다.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음에도 앞으로 교육 현장이 어떻게 변할지 대략적인 밑그림은 나와 있다. 제대로 가는 건지 지적하는 목소리는 적지 않지만 말이다. 변화의 폭은 작지 않다. 일단 올해부터 수능시험이 문·이과 통합형으로 치러지고, 고교학점제도 확대해 2025년에는 전면 도입한다.

이렇게 되면 대입 개편이 불가피하다.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면 학생들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이수 교과목이 달라지니 대학의 신입생 선발 방식도 변해야 한다. 수능시험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그 위상과 모습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수능시험 틀에서 서술형이 가미될 수도 있다. 절대평가로 바뀐다면 자격고사(대입 자격을 얻는 옛 예비고사처럼)가 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그리 되면 대입에서 수능시험의 영향력은 줄 수밖에 없다.

내년 7월 국가교육위원회가 정식 출범한다고 한다. 교육 논리에 기초해 '백년지대계'를 다지는 게 목표다. 야당 등 일부가 '현 정부의 교육 분야 알박기'라며 반발했으나 배를 띄우기로 했다. 문제는 이곳의 주요 과제 중 고교학점제 도입과 대입제도 개편 작업이 쉽지만은 않으리라는 점. 이런 과제는 이미 정치권발(發) 태풍에 말려드는 모양새다.

야당 대선 주자 중 한 명은 '수시 폐지, 정시 100%'를 주장한다. 현 정부의 정책 기조와 사뭇 다르다. '고교학점제 도입과 이에 따른 대입 개편'이란 틀이 자칫 '오년지소계'(五年之小計)가 될 판이다. 정시는 수능시험 위주다. 수능시험이 가장 공정하고, 그게 서민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착각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저서로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이란 책에서 누군가의 능력만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없다고 했다. 달리기 시합도 출발선(가령 지능, 신체 조건)이 같지 않으면, 출발선이 같아도 누구는 맨몸이고 누구는 부모가 사준 자동차를 탄다면 공정하다 할 수 없다.

진영 논리로 편가름할 일도 아니다. 정시 확대를 말하면 보수이고 수시, 그중에서도 학생부종합전형 비중을 늘리자면 진보라 낙인찍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수능시험은 김영삼 정부 시절 시행됐고, 학생부종합전형은 박근혜 정부 때 확대됐다. 지지 후보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듣고 맹목적으로 추종할 게 아니라 정책의 본질을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오년지소계'가 아니라 '백년지대계'의 주춧돌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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