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잡문집'이란 제목의 책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툼한 에세이집이다. 찰랑찰랑한 수평선이 그어진 제주 바닷가의 찻집에 앉아 보던 책에는 '수상소감' 몇 꼭지가 나온다. 몇 문장은 눈에 익어 곰곰이 생각하니 하루키의 다른 에세이집에서도 읽은 글이다.
상을 받고 쓴 그의 글 중에 '소설가는 늘 시간을 상대로 싸우는 존재'라는 문장과 '시간의 세례에도 가능한 한 풍화하지 않는 작품을 쓰는 것'이란 문장은 다시 봐도 반가웠다. 문득 오래 전 그의 말을 번안해 내가 썼던 수상소감도 떠올랐다. 2014년 인당미술관 개인전을 마친 후 새로운 수묵작업을 시작하던 해였다. 내용은 이랬다.
"… 첫 개인전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군요. 돌이켜 보면 뭔가를 옮겨 그림으로 그리고, 붓글씨를 쓰는 일에 대한 첫 기억은 뚜렷합니다. 아마 다섯 혹은 여섯 살의 기억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뭔가를 그리고, 만들고, 쓰는 일을 반복했으니까요. 그러니 세상의 어떤 매혹적인 관능도 나를 흔들진 못한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림을 시작한 원인과 동기가 특별히 없다는 얘기도 됩니다.
… 눈만 껌뻑껌뻑하는 사이에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어쩌면 한편으로 자신이 참 기특하기도 합니다만 별달리 내가 하는 일 외에는 관심가는 세상도, 신기하게 고개 끄덕끄덕할 어쩌고저쩌고 하는 일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지난 한 해는 고단했습니다. 옹색한 현실이 지속되어 염치없는 관성은 붙은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가 않더군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던 시인 최승자의 말처럼 제 나이 꼭 서른에 첫 개인전을 덜컥해 버렸습니다. '그래 일단 내 소리만 질러보지 뭐'하고 시작한 개인전이 마흔 몇 번의 개인전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쩌면 오랫동안 주변의 신세로 번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온 마음을 다해 '화가는 늘 공간을 상대로 싸우는 존재'로 '세월에 풍화에도 오롯이 각인되는 작품을 남기는 일'로 새로운 전개를 할 것 같아 마음은 다소 들뜹니다. 상을 받는다는 것이 어른이 된 지금은 생소합니다. 분에 넘치는 수상을 하게 되어 기쁩니다. 때문에 이제 그 까닭에 골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잡문집을 읽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제주도 서귀포의 작업실은 큰 야자수가 가지를 내린 공간이었다. 이중섭미술관 레지던시에 참여해 1년간 작업을 하며 가창작업실을 설계하던 때이기도 했다. 아무튼 하루키의 문장이 좋아서 '시간의 세례에도 가능한 한 풍화하지 않는 작품을 쓰는 것'을 '세월에 풍화에도 오롯이 각인되는 작품을 남기는 일'로 번안해 인용했다.
지난달 53번째 개인전을 마쳤다. 당분간 오래 지속 될 수도 있지만, 작업의 휴지기가 필요할 것 같다. 지금껏 많은 동어 반복이 지나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작품에 대한 새롭고 깊은 사색의 시간으로 들어갈 시기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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