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김지혜 그림책서점 '소소밀밀' 대표

김지혜 그림책서점 '소소밀밀' 대표
김지혜 그림책서점 '소소밀밀' 대표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덧문을 아무리 닫아 보아도 흐려진 눈앞이 시리도록 날리는 기억들."

싱어송라이터이자, 문학적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루시드폴'의 음악,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의 한 부분이다. 비가 오는 날과 어울려 여러 번 듣고 있다. 나는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름 모를 그의 팬이 생각난다.

루시드폴은 15년간 써 온 52편의 노랫말을 묶은 가사집 '물고기 마음'을 2008년에 펴냈다.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도 그의 가사들은 문학적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처음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 유독 당사자만은 그냥 흘려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고기 마음' 머리말에 간단히 적혀 있다. '음악적 요소가 빠진 노랫말은 어쩐지 앙상해 보여 드러내기 민망스럽고, 무엇보다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는 달리 그의 첫 번째 책은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며, 널리 사랑을 받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루시드폴이 나온 방송을 듣게 되었다. 공연을 마친 루시드폴은 팬에게 수첩 하나를 선물로 받았는데, 수첩에는 그의 노래 가사가 손글씨로 가지런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선 차분하게 읽어보지 못하다가 새 작업을 하기 위해 고민에 빠졌던 어느 날, 수첩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쓴 가사를 다른 사람이 손글씨로 옮겨 쓴 것을 보니, 완전히 새로운 가사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아마도 정성스럽게 쓴 누군가의 마음이 그에게 닿았던 것 같다.

얼마 전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점에 온 어린이 손님이 가방 속에서 수줍게 무언가를 꺼내 보여 주었다. 세상에! 그건 몇 달 전 경주 여행길에 구매한 그림엽서들이었는데, 직접 색칠한 엽서들을 보여 주고 싶어 다시 서점을 찾아 왔다고 했다. 남편이 그려 놓은 그림엽서가 어린이 손님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되었다. 여러 색의 색연필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으며, 배지로 액자까지 만들어 더욱 근사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무언가 주고 싶어 주섬주섬 작은 문구류를 챙겨 어린이 손님에게 쥐어 주었다. 어린이 손님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고맙고 사랑스러운 마음에 막 안아주고 싶었다. 어린이 손님이 보여준 그림들이 고여 있던 나의 일상을 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들은 불쑥 찾아온다. 일상이 바빠 주변을 살피지 못하거나 작은 글귀조차 읽기 싫은 날, 환한 빛처럼 스스로 걸어 들어온다. 이제 루시드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를 들을 때면, 어린이 손님의 수줍은 얼굴과 그림엽서들이 함께 생각날 것 같다. "정말 고마웠어! 다음번엔 내가 먼저 널 알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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