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가. 나요양소(癩療養所) 인간 공동묘지에 함박눈이 푹푹 나린다. 추억같이…, 추억같이…. 고요히 눈 오는 밤은 추억을 견뎌야 하는 밤이다. 흰 눈이, 차가운 흰 눈이 따스한 인정으로 내 몸에 퍼붓는다. 이 백설 천지에 이렇게 머뭇거리며 눈을 맞고만 싶은 밤이다. 눈이 오는가. 유형지(流刑地) 나요양소 인간 공동묘지에."
한센병을 앓은 시인 한하운이 쓴 시 '신설'(新雪)의 일부다. 사회로부터 격리돼 형벌 같은 삶을 살았던 한센인들의 설움을, 그럼에도 따스한 인정을 첫눈같이 기다리던 그네들의 염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한센병은 '나균'(癩菌)에 의한 감염성 질환이다. 피부와 점막, 안구에 각종 염증을 일으키고 감각이 저하되며 심한 경우 손가락, 발가락 등 신체의 말단부가 떨어져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치료제가 개발돼 쉽게 완치된다.
그럼에도 흉측한 외형으로 인해 '문둥이'라 불리며 차별을 받아왔다. 유전되거나 전염이 쉽게 된다는 오해와 편견으로 그 가족까지 낙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못된 인식과 무지가 낳은 '사회적 질병'인 셈이다.
과거 한센인들이 겪은 아픔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단종과 낙태를 강요당하고 태아가 유리병 속에 담겨 전시되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유 없이 맞거나 교육, 직업 등 기회를 박탈당하는 등 인권 유린이 만연했다.
또 정부의 강제 격리 정책으로 깊은 산속으로 쫓겨나 현대판 고려장을 당해도 억울하다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왔다. 정부와 사회가 편견과 차별을 통해 한센인들이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나약한 이방인으로 살게끔 만든 것이다.
지난해 경주 희망농원에 거주하는 한센인 138명이 열악한 주거 환경과 복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어렵게 국민권익위의 문을 두드렸다. 경주 희망농원은 1961년 정부의 한센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형성됐다. 그동안 주민들은 여러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고 각종 언론에서 6년에 걸쳐 90여 회가 넘는 보도가 이루어졌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현장을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은 집단 계사와 주택이 혼재된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400동이 넘는 폐축사는 노후화돼 방치돼 있었고 가축 분뇨를 비롯한 각종 오물이 정화되지 않은 채 형산강으로 방류돼 악취가 코를 찔렀다. 환경 피해는 물론 마을 주민들의 식수원 오염도 심각한 상태였다.
국민권익위는 경주시, 환경부, 농식품부 등과 10여 차례 협의를 거쳐 452동의 양계장 철거, 하수관로 정비 등 환경 개선은 물론 복지 향상 대책을 수립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소외된 한센인의 삶을 돌아보며 그들의 아픔을 품어 안는 계기가 됐다.
국민권익위는 한발 더 나아가 한센인을 '그들'이 아닌 '우리'로 보고 근본적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전국 82개 한센인 마을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조사 과정에서 파악된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병'이 아닌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라는 '마음의 병'이 사회 전반에 폭넓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령자인 이들은 조만간 모두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사회적 낙인의 굴레를 평생 짊어진 채 살아온 처절한 삶들이 사장(死藏)돼 그대로 잊힐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우리 모두가 한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해소를 위해 나서야 한다. 경주 희망농원 사례가 시인 한하운이 그토록 기다렸던 첫눈이 되어 앞으로 더 많은 한센인 마을에 함박눈으로 나리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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