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소통과 성찰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과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과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과 교수

한자성어에 '하충불가이어어빙'(夏蟲不可以語於氷)이란 말이 있다. 여름에만 사는 벌레는 얼음이 얼마나 차가운지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여름에 사는 곤충은 더위만 알고, 겨울에 사는 곤충은 추위만 알 뿐이다. 그렇다. 소통이 없으면 한 집에 살아도 서로 대화가 되지 않고, 같은 류의 곤충이지만 경험이 다르면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제4차 산업혁명은 소통의 혁명이다. 인간 생활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의 진원지는 텔레커뮤니케이션(telecommunication)이다. 인터넷과 로봇,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은 시공의 경계를 넘어 초연결 사회를 향하고 있다. 대면하지 않고도 각양각색으로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어떤 장소에서 누구하고든 실시간 대화는 물론이고, 정보도 마음껏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이 안 된다면 소통 수단의 많고 적음과, 소통 기술의 발달 여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물며 네트워크가 아무리 많아도 네트워킹이 안 되면 소용이 없다. 오늘날 소통 수단이 넘쳐나지만 소통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있다. 단숨에 지구 반대편까지 소통이 가능해졌지만, 바로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지붕 아래 사는 자녀와 대화도 안 되고, 평생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의 마음도 서로 이해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제 사람과의 만남은 회피하고 반려동물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기계와 소통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세상은 소통을 외치지만 많은 사람은 단절 속에서 외롭게 살아간다. 21세기 소통 혁명 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소통의 장애로 고통당하고 있다. 자녀들과 진심어린 대화를 소망하고, 가까운 이웃과 친척, 그리고 회사 동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진정한 소통의 길은 요원하다. 그 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소통하려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든, 편지를 쓰든, 찾아가 말을 걸든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소통으로의 중요한 매체는 대화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화 이전에 무엇을 대화할 것인지,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가다듬는다. 자신과의 소통 후에 대화를 시도한다. 자신과의 소통에서 중요한 매체가 성찰이다. 성찰은 자기 자신과 하는 소통의 행위다.

다른 사람과 원만한 사귐은 자기와의 소통에서 시작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는 진정한 소통은 이뤄질 수 없다. 그래서 명대 유학자 여곤(呂坤)은 '신음어'(呻吟語)에서 '마음의 성찰'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눈이 흐려져서 눈앞이 어른거릴 때는 무엇을 보아도 잘못 보게 되고, 귀에 병이 있어 귀울림이 있을 때는 무엇을 듣더라도 잘못 듣게 된다. 마음속에 어떤 사물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때는 무엇을 처리하든지 잘못 생각하게 된다." 여곤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반성하며, 매일 자신의 생활을 기록하면서까지 자아를 분석했다. 왜 그렇게 했겠는가.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꽉 찬 마음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독서하기 좋은 가을이다. 이 가을에 아무리 좋은 책을 읽어도 진영 논리와 프레임에 갇힌 사람은 영혼이 살찌지 않는다. 마음이 선입견에 젖어 있으면 제대로 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진정한 소통은 마음의 가난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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