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코로나 끝나면 가고 싶은 그 곳'] 쿠바 아바나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그가 머물던 호텔방·집 고스란히

쿠바 아바나의 도심 스카이라인 위로 석양이 비추고 있다.
쿠바 아바나의 도심 스카이라인 위로 석양이 비추고 있다.

아마도 아시아에선 거의 첫 혜택을 입지 않았을까 싶은데, 2016년 미국 오바마대통령의 쿠바 방문으로 50여년 만에 재개된 미국, 쿠바 간 항공노선으로 나는 하바나로 갈 수 있었다. 2017년 1월이었고 뉴욕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지나간 20세기에 청년기를 보낸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쿠바는 체 게바라, 혁명, 그란마호, 카스트로 등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이며. 금주법, 밀주, 마피아, 대부 등으로 점철된 아메리카 느와르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쿠바와 하바나에서는 특히 이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을 떼 놓을 수 없다.

그는 멕시코만에서 돛단배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는데, 지난 팔십사 일 동안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 했다.(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헤밍웨이는 이 노인과 바다로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헤밍웨이는 1932년부터 1960년까지 쿠바에 머물렀다. 그의 흔적은 체 게바라와 함께 하바나의 온 거리마다 가득할 터였다.

대서양을 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이미 '관타나메라' '베사메무초' 등의 감칠맛 나는 음악이 넘쳐난다. 공기는 점점 더워지고 있다. 우리 일행은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입고 온 겨울 외투를 벗어 트렁크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와아! 함성을 질렀다. 드디어 우리는 쿠바에, 하바나에 왔다! 카리브해의 진주, 이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산 크리스토발 데라아나 대성당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산 크리스토발 데라아나 대성당

◆하바나,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도시의 이름 '아바나(하바나)'는 스페인이 처음 정착지를 조성할 때 원주민이었던 타이노족 족장의 딸 이름에서 따왔다. 구시가지 끝자락 메르카데레스 거리에는 수많이 쿠바노스들이 잇몸을 드러내며 살사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하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고 지나가며 우리는 금세 그 공기에 휩싸여 무장해제되어 매혹되고 말았다. 실제로 그러기엔 채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순간 남루하고 궁핍한 하바나의 모든 것은 밝은 햇살 아래 펼쳐지는 환타지가 되어버렸다.

헤밍웨이
헤밍웨이

그 유카탄 반도의 햇살에 심하게 홀렸던지 오비스포(Obispo) 거리 초입에서 나는 플로리디타 간판을 보다가 홀로 인파에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다이키리의 요람'이라는 간판의 문구답게 술집 안의 사람들은 녹청색 빛이 도는 술잔을 앞에 두고 헤밍웨이처럼 바에 기대어 온갖 언어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가까스로 나도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는 곳에 기대 '다이키리 파파 헤밍웨이, 플리즈'를 소프라노로 외치자 바텐더가 잽싸게 삼각잔을 내민다. 마셔보니 역시 설탕 맛이 빠진 제대로 된 술맛이다.

카리브해의 해적과 적 함대의 침입으로부터 아바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모로 성은 1589년부터 1630년까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모로 성은 아바나와 말레콘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
카리브해의 해적과 적 함대의 침입으로부터 아바나를 지키기 위해 세워진 모로 성은 1589년부터 1630년까지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모로 성은 아바나와 말레콘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

다행히 일행들은 암보스문도스호텔 로비에 있었다. 내가 일행에서 빠졌던 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어떻게 헤밍웨이의 흉상 옆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으랴. 모두 아쉬움에 소리를 지른다. 신대륙과 구대륙이란 뜻을 가진 호텔엔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하며 7년을 머물렀던 511호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그곳엔 1920년대 파리에서 함께 어울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모두 영인본이었다. 진품은 쿠바가 봉쇄되기 직전 헤밍웨이의 아내들 중 셋이 찾아와 모두 떼어갔다고 했다. 그는 네 번 결혼을 했다.

바로크 양식의 고풍스러운 산 크리스토발 데라아나 대성당과 옛 총독 관저의 아르마스 광장, 산 프란시스코 광장 그리고 카피톨리오(국회의사당)에서도 이젠 상품이 된 헤밍웨이와 게바라의 모습이 엽서와 모뉴망, 열쇠고리가 되어 공기처럼 우리를 따라 붙었다. 게다가 음료수처럼 마셔댄 모히또의 취기 탓이었는지 레알 푸에르사 앞에 늘어선 형형색색의 클래식카는 흡사 놀이동산에 온 듯 우리를 들뜨게 했다. 노란색 뷰익 컨버터블을 잡아 흥정을 하고 파도가 넘실대는 말레콘이 늘어선 도로를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달렸다. 역시 먼저 다녀온 누군가의 말처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찾아 길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골목마다 도처가 그곳이었으니 말이다.

쿠바속의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바라데로 해변.바다 속이 보일만큼 투명하며 하얀 백사장이 아름답다.
쿠바속의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바라데로 해변.바다 속이 보일만큼 투명하며 하얀 백사장이 아름답다.

◆노인과 바다, 핀카 비히아 그리고 쿠바 속의 천국 바라데로

헤밍웨이는 형용사와 부사를 쓰지 않는 하드보일드한 자신의 글처럼 평생을 살았다. 격렬하고 폭력적이며 진취적인 진정한 마초였다. 6피트(183cm)가 넘는 거구였으며 항상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하지 못해 사냥, 투우, 복싱 등 위험하고 강렬한 스포츠를 즐기고, 싸움도 잘했다. 낚시로 잡은 청새치(만새치)를 들고 찍은 사진도 쿠바 곳곳에서 팔리고 있다. 그는 1차세계대전과 스페인내전, 2차세계대전 중 노르망디상륙작전에도 위생병과 종군기자로 각각 참전했다.

코히마르(Cojimar)는 아바나에서 25㎞ 떨어진 어촌이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마을이며 헤밍웨이가 자신의 배 필라호를 정박해 두었던 곳이다. 소설의 실제모델인 그레고리오 노인을 만난 술집 테라자도 성업 중이고, 마을 초입엔 그를 기리며 어부들이 닻을 녹여 만든 헤밍웨이의 흉상 그리고 외해에 면한 물때가 낀 모르요새가 있다. 흡사 등대 같은 요새의 붉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낡은 나무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는데, 어쩌면 폭풍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럼주를 마시거나 글을 썼으리라.

1940년부터 쿠바를 떠난 1960년까지 헤밍웨이가 살았던 저택 핀카 비히아(Finca Vigia)는 농장의 망루 또는 전망 좋은 집이라는 뜻이다. 4ha의 넓은 저택에는 정글 같은 정원과 수영장 그가 타고 다니던 배가 전시되어 있다. 실내엔 침실과 거실, 주방 그리고 9천여 권이 넘는다는 서적과 각종 원고, 수천 장의 사진과 편지 등과 책에 끼운 수천 장의 쪽지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한다. 늘 서서 원고를 썼다는 그의 습관을 보여주듯 타자기는 서랍장 위에, 벽엔 사냥한 짐승들의 머리가 박제된 채 걸려 있었는데, 우리는 닫힌 유리문을 통해서만 저택 안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밖을 바라보았다는데 나는 헤밍웨이의 무언지 모를 그때 그 감정이 아릿하게 느껴졌다.

하바나에서 차량으로 두 시간을 달려 쿠바 속의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바라데로로 갔다.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휴양지답게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모인 듯 북적거린다. 바다는 속이 보일만큼 투명하고 하얀 백사장은 천국이구나 싶을 만큼 아름답다. 멕시코의 칸쿤과는 또다른 분위기다. 수천 명은 족히 수용할만한 최고급 리조트는 흥청거렸고 우리는 밤새도록 미국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영국인들과 피나 콜라다를 마시며 리조트의 넓은 로비와 클럽에서 춤을 추었다. 일생에 단 하루만 허락된 것 같은 축제의 날이었고, 남국의 별빛과 달빛이 모든 사람의 눈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밤이었다.

박미영 시인
박미영 시인

박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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