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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 천경자(1924-2015),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미술사 연구자

1977년(54세), 종이에 채색, 43.5×36㎝,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1977년(54세), 종이에 채색, 43.5×36㎝,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천경자는 인물을 많이 그렸고 대부분 여성이다. 자화상도 있지만 그녀의 여성인물상은 다른 사람의 모습에 비친 자신인 경우가 많아 '자전적 여성 인물상'이 천경자 회화의 주요 모티브이다. 멕시코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가 "내가 나 자신의 뮤즈다"(I am my own muse)라고 했듯이 천경자에게 영감을 준 뮤즈는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인 그녀 자신이었다. 화가들은 작품을 또 다른 자아로 여긴다. 천경자도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그림은 더욱 그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몇 단계를 거치며 진화한 천경자의 화화세계에서 단독 여성 인물상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 전형이 자화상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이다. 서양과 미술문화가 달라 조선의 화가들은 자화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김시습, 이광좌, 윤두서, 강세황, 채용신 등의 자화상이 전하지만 김시습은 판화이고, 이광좌와 채용신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 여성화가로는 나혜석의 1928년 유화가 처음으로 여겨진다. 천경자는 1969년 남태평양의 섬을 여행할 때 자화상을 여러 점 스케치로 그렸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천경자의 대표 자화상이다. 시적인 제목과 달리 좀 무시무시한 이 자화상은 32년 전으로 돌아가 스물두살 때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다. 자화상은 대부분 현재의 자신을 기록하려는 그림인데 비해 특이하게 과거형인데다 사실적이지도 않다. 자신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하나의 전형인 통시적 자화상이다.

당당하게 정면을 주시하고 있지만 표정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노란 눈동자의 흰 동공이 어딘지 슬프면서도 결연한 초월의 느낌을 준다. 1970년대 들어서면 흰 동공이 나타나고 이어서 눈동자의 검은색이 노란색으로 바뀐다. 천경자는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금가루를 섞어 노란 눈동자를 그리면 더욱 강렬한 빛을 내면서도 슬퍼 보인다"고 했다. 인물을 설명하는 소도구는 머리에 띠처럼 두르고 있는 초록과 주홍의 뱀 4마리와 가슴의 분홍장미 한 송이다. 이집트여행에서 보았던 파라오의 지혜와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 장식인 우라에우스(uraeus)에서 받은 영감과 화가 천경자를 알린 뱀 그림 '생태'의 아름다운 독사를 결합했다.

천경자보다 두 살 아래인 박경리는 시 '천경자를 노래함'(1988년)에서 천경자를 '용기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좀 고약한 예술가'라고 했다. 1960년대 중반 박경리가 일간신문에 장편 '파시'(波市)를 연재할 때 천경자가 삽화를 그려 둘은 한때 매일 어울려 다녔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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