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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글지글-지면으로 익히는 글쓰기] 수필- (5)'그래서'에서 얻은 상처, '그럼에도'로 치유

장호병 수필가

장호병 수필가
장호병 수필가

80 대 20. 빌프레도 파레토가 말하는 불균형 비율이 앎의 세계에서는 모르는 부분이 80%이리라.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 속에는 '나만 아는 나', '남만 아는 나', '나도 남도 아는 나', '나도 남도 모르는 나'가 있다. 나도 남도 나에 대해 안다는 건 고작 20%, 모르는 게 80%다. 글쓰기는 그 80%에 다가가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다가가는 데는 두 종류의 렌즈가 있다. 그 하나가 '그래서'요,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이다. 전자가 학문적 또는 과학적 접근 방법이라면 후자는 문학적 또는 해석적 접근 방법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만 자칫 나를 중심으로 한 지식과 합리성을 앞세우다 보면 세상과 마찰을 일으키기 쉽다.

"부처님은 어두운 곳에 불 밝히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어두운 해우소 앞에 등을 밝혀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부처님 뜻을 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정희의 '등'(燈) 결미)

초파일 풍경이다. 등을 예약하고 당일 저녁 늦게 사찰에 도착해 자신의 등을 확인하니, 법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곽지고 허름한 화장실 앞에 걸려 있었다. 거금에 맞지 않는 처사라며 울분을 토하자 A씨가 친구를 달래는 장면이다.

한쪽진 해우소 앞이 등의 용도 면에서나 부처님 뜻으로나 가장 값진 자리라는 깨우침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라는 렌즈가 통념적 인식과는 다른 결과를 불러오지만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물론 독자에게도 위안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할머니는 친할머니로, 외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로. 결국 과거의 외할머니란 외로운 자리에 친할머니가 자리하게 된 처지가 아닌가. 선 돌이 박힌 돌을 빼고 그 자리에 누운 격이다. 반세기 만에 이룬 엄청난 변화의 자리에." (은종일의 "'친'자가 붙어 더 외로운" 중에서)

할머니보다 친할머니로 불릴 때 역설적이게도 더 서운하고 외롭다. 삶이 투영된 언어에서 음지가 양지로, 양지는 음지로 입장이 바뀌는 세상 인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서로 주의 주장이 다르고, 설혹 진영이 다르다 할지라도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게 만드는 지점, 그것은 수사도 으름장도 아니다. 경청과 겸손뿐이리라." (졸작의 '만능키' 결미)

인간의 학습시간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지고 있다. 고등동물일수록 상징적 반응을 나타내는데 똑똑한 사람이 넘쳐나는 오늘날 우리의 인식체계는 '그래서'라는 신호적 즉각 반응이 난무한다. 횡행하고 있는 상호불신과 상처는 오히려 학습효과의 기현상이 아니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누구를, 무엇을 쓰든 수필에는 작가 자신의 성찰이 담겨있다. 일상에서 간과하고 있던 나 안의 나를 만나게 된다. 나와 다른 너를 세워주려는 나를 탐구하고, 투영하는 문학이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장호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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