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나라 밖 세계인과 연대해 ‘나라 되찾기’ 나서

외국인 항일운동 지원

일본인 후세 다쓰지(맨 왼쪽), 프랑스인 루이 마랭, 캐나다인 석호필, 중국인 신부 우빈 順
일본인 후세 다쓰지(맨 왼쪽), 프랑스인 루이 마랭, 캐나다인 석호필, 중국인 신부 우빈 順

국조 단군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세상을 다스려 교화(敎化)하는 재세이화(在世理化)를 바랐다. 그래선지 옛 선조는 백성의 세금을 가볍게 했다.

중국의 이상인 10분의 1세 즉 십일세(十一稅)의 절반인 20분의 1세를 거두는 입일세(卄一稅)를 시행했다.

그 삶의 터전은 중국 대륙에 드넓게 퍼진 강역이었다. 특히 가혹한 세금에 시달린 중국인에게 옛 조상의 삶터는 군자(君子)의 나라로 비칠 만했으리라. 중국 성인(聖人)으로 평가받는 공자(孔子)조차 뗏목 타고 가고 싶다는 속내를 보인 곳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역사의 한민족은 이민족 외침을 1천번쯤 받았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약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 외침도 버티며 한국인은 세계인과 연대로 독립의 길을 찾았다. 1919년 한국 유림(儒林)이 1천400자 넘는 긴 편지를 국제사회에 보낸 파리장서운동을 통한 협력과 연대의 호소도 같은 맥락으로, 대략 다음과 같다.

"한국 유림 대표…137명은 파리평화회의 제위(諸位)께 삼가 이 글을 보내노라.…한국이 비록 국력은 약소하나…어찌 이웃 나라의 다스림을 받으리오.…몸을 묶이어 죽음에로 나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아니 하리다.…제위께서는 생각하시라."

일제에 맞서 외국인들이 자국 정부·의회·국민과의 연대, 한국독립 호소·청원, 친한(親韓) 여론 형성 및 모임 등으로 지원한 사례는 많다. 정부도 이들을 발굴, 서훈하고 있다. 6·25전쟁 때 국제연합(UN)의 도움을 새기려 매년 10월 24일(유엔결성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처럼, 외국인의 한국독립 지원과 연대 활동도 기릴 만하다.

중국인 저보성
중국인 저보성

◆서훈된 이웃 나라 사람들

일본인으로 경북 문경 출신 박열(대통령장)을 도운 아내 가네코 후미코(애국장), 변호사 후세 다쓰지(애족장)가 있다. 가네코는 1923년 박열이 주도한 단체 불령사(不逞社)에 가입, 활동했고 1924년 박열의 대역(大逆) 사건에 연루,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수감 중 1926년 삶을 마감했다.

일본인 후세 다쓰지
일본인 후세 다쓰지

후세 변호사는 1923년 의열단원 김시현(미서훈) 등의 조선총독부 폭파계획 사건, 1924년에는 일본 이중교투탄의거 주인공 김지섭(대통령장)을 변론했다. 또 1926년 박열사건 변론,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의 권오설(독립장) 등을 맡아 일제 고문 만행을 폭로했다.

상해 망명정부가 있던 중국 국적 독립유공 서훈자는 가장 많다. 장개석(대한민국장)과 부인 송미령(대한민국장), 손문(대한민국장) 같은 지도자에서부터 하상기(건국포장) 중국 여성 독립투사까지 다양하다. 특히 여성 독립투사 두군혜(애족장)와 이숙진(애족장)은 각각 한국인 독립운동가인 김성숙(독립장), 조성환(대통령장)과 결혼, 남편의 항일투쟁에 합류했다.

중국인 당계요
중국인 당계요

또 당계요(대통령장)는 30~50명의 한인 청년들이 운남육군강무대에 입학해 수업을 받도록 하고, 일제 방해에도 한국과 우의(友誼)를 지켰다. 중국 천주교 남경교구 우빈(대통령장) 총주교는 1940년 350만 천주교도에게 총동원령을 내려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과 중국 정부의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다. 저보성(독립장)은 1932년 윤봉길 상해 폭탄투척 의거 이후 일제 추격을 받던 김구 지도자 등 임시정부 요인 신분 보호와 피신·은신처 제공 등의 활동을 펼쳤다.

◆서훈된 먼 나라 사람들

미국인 가운데 유일한 여성인 미네르바 루이즈 구타델(건국포장) 선교사는 1903년 한국에 파송돼 전도활동을 하다 1912년 귀국해 3·1운동 소식을 듣고 한국의 참혹상을 알리고 독립운동 지원에 나섰다. 또한 1919~1920년 시카고에서 한국친우회 서기로 활동하며 의회와 정부에 한국 독립문제를 청원하는 등 친한(親韓) 여론 형성과 한인 구제모금 등에도 노력했다.

호머 베잘렐 헐버트(독립장)는 1906년 『대한제국멸망사』 책으로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밀사로 파견돼 을사늑약과 일제의 한국 침략 부당성을 호소했다.

미국인 윤산온
미국인 윤산온

윤산온으로 불린 미국인 조지 새넌 맥큔(독립장)은 평양 숭실학교장으로 항일운동을 지원했고, 1920년 방한 미국 의원단에 대한독립승인신청서를 전달했다가 추방됐고 1928년 다시 입국, 숭실학교장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해 학교 폐교 등 탄압을 받았다.

영국인으로 한국명 배설로 유명한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대통령장)은 1904년 러일전쟁 취재 특파원으로 방한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항일 논설로 일제 침략을 고발했다.

영국인 배설
영국인 배설

대구에서 퍼진 국채보상운동 확산에도 기여했으나 일제 탄압도 받았다.

조지 루이스 쇼(독립장)는 중국에서 자신이 경영하는 이륭양행 회사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두고 무기운반과 군자금 전달 등 용도로 쓰게 했다. 프레드릭 에이 맥켄지(독립장)는 언론사 종군기자로 방한해 취재한 내용을 책으로 일제 침략상을 알렸고 뒷날 1920년 영국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해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캐나다 국적의 스탠리 해빌랜드 마틴(독립장)은 중국 길림에서 병원장으로 의료선교를 하면서 3·1운동 때 사상자 치료와 장례식 거행, 1920년 경신참변 당시 한국인 피해자 위로와 일제 만행의 국제사회 폭로 등의 활동을 폈다. 석호필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독립장)는 3·1운동 때 만세를 외치고 수원근교 제암리 교회 학살 참상을 사진에 담아 세계 언론사 등에 고발했다.

아일랜드인 나도마
아일랜드인 나도마

아일랜드 국적인 패트릭 도슨(애국장)과 나(羅)도마로 불린 토마스 다이엘 라이언(독립장)은 제주천주교회 신부로 일본 비판과 주민의 항일 의식을 북돋우다 각각 징역 2년6개월과 금고 2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프랑스의 정치인 루이 마랭(애국장)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때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은 이후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21년 국회 하원 의원으로 파리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았다.

외국인 독립운동가
외국인 독립운동가

◆외국인 서훈, 얼마나 되나

2021년 8월 15일 현재 독립운동 서훈자는 16,932명이며 외국인은 72명으로, 가장 높은 등급의 훈격인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독립장 35명, 애국장 4명, 애족장 13명과 건국포장 4명이다. 국적은 중국 34명(47%), 미국 21명(29%), 영국과 캐나다가 각각 6명(8%)이다. 일본과 아일랜드 국적이 2명씩(3%), 1명은 프랑스이다. 이들 가운데 여성은 6명으로, 중국 4명, 미국과 일본 각 1명이다. 이들과 별도로, 한국인 후손 서훈 외국인도 20명 있다. 국적은 최초 여성사회주의자로 알려진 김알렉산드라(애국장) 등 러시아 12명, 청산리대첩에 기여한 독립운동가 최진동(독립장)의 동생 최운산(애족장) 등 중국 7명, 멕시코의 이병호(건국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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