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정치를 위한 변명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원장·시인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원장·시인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원장·시인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이 있다. 마르크 블로흐(1886~1944)라는 프랑스 역사학자의 역사에 대한 사색과 방법론 등을 기술한 책이다.

인간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새로운 미래를 배운다는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구 위 인간의 역사는 침략과 폭력으로 얼룩져 왔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한 어린 소년이 역사가인 자기 아버지에게 질문했다는 "아빠, 도대체 역사는 무엇에 쓰는 것인지 이야기 좀 해 주세요"라는 이 물음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품고 있다는 데서 질문자가 어린아이라는 사실과 달리 인류의 고전적인 명제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1980년대 초 군 복무 중에 구입해 동료들의 눈을 피해 몰래 읽었는데, 책 내용보다는 특히 지은이의 삶이 인상적이어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마르크 블로흐는 1944년 6월 16일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 자기 고향 리용에서 50㎞ 정도 떨어진 벌판에서 총살당한다. 이미 6명의 자녀를 두고 소르본이라는 명문 대학의 교수까지 지낸 그가 대독 항전에 직접 참여하고, 조국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고향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나치에 체포돼 고문 끝에 결국 총살당한다. 마르크 블로흐의 이런 삶을 보면서 인간의 실존은 무엇이며 지식인의 역사적 책무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이 명제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저서 '정치학'에서 한 말이다. 원래 정치(politics)는 그리스 고대 도시국가인 폴리스(polis)에서 유래됐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폴리스는 왕이 전제적으로 통치하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운영했다. 물론 당시의 시민은 노동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들이고 노예와 여성들이 노역을 담당했다는 역사적 한계는 있다. 인간은 고독한 섬처럼 혼자서 살기 어려워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갈등과 불화를 소통과 조정으로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폴리스였다. 그래서 소통과 조정을 중시하는 정치라는 용어가 폴리스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내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라 전체가 정치의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정의당은 자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했고, 제1야당인 국민의힘은 후보를 선출하기 위해 최종 경선 중이다. 여기다가 국회의 국정감사까지 겹쳐 나라 전체가 온종일 정치적인 사안들로 요동을 치고 있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도덕적으로나 지도자로서 자질 문제까지, 저런 사람이 어떻게 감히 대통령에 나오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을까'라는 의혹을 받는 사람도 있다. 더구나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진영으로 뚜렷하게 나뉘어 한 편에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상대 진영에서는 믿지 않는 불신이 극도로 팽배한 상황이다.

그러나 크게 절망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는 원래 갈등을 먹고 성장한다. 지역, 부(富), 직업, 젠더, 종교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뉘어 있는 인간들에게 갈등이 없을 순 없다. 이 갈등을 조정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게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인들이 주야장천 싸운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가 내면적으로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회의원과 같은 현실 정치인이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치 없는 인간 공동체는 있을 수 없다. 국민이 자기 성찰과 공부를 통해 현명한 지도자를 뽑는 게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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