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김지혜 그림책서점
김지혜 그림책서점 '소소밀밀' 대표

딸아이가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골라 구매한 책들로 말이다. 타지에서 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는 매주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버스터미널에는 대형 서점이 있다. 아이는 자주 서점에 들러 자신에게 맞는 장르를 찾다가 소설에 완전히 꽂혀 버렸다.

하루는 용돈을 다 써버렸다며, 급하게 돈을 이체해달라고 전화를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마음에 드는 책이 너무 많아서 여러 권 사다 보니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아이는 매주 서너 권의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 지인이 저녁 무렵에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주문했는데, 다음 날 아침 현관문 앞에 배송된 것을 보고 너무 놀랐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지나치게 빠른 배송에 섬뜩한 기분까지 들었다며. (온라인 서점에서 보내준 책이 맞느냐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고 한다) 하지만 빠르게 배송된 책 덕분에 출근길에 바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참 편리했다고 말했다.

그 편리함이 배송뿐이겠는가. 원하는 책은 바로 찾을 수 있고, 할인과 적립, 각종 사은품까지. 안타깝지만 그런 혜택을 오프라인 서점, 동네 서점에서 똑같이 제공하기는 힘들다. 애초부터 온라인 서점과 동네 서점은 공급률 자체가 차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온라인 서점이 아닌, 동네 서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서점만 봐도 그렇다. 일부러 서점에 찾아와 책을 사 간다. 정기적으로 들러 한 보따리씩 책을 사 가는 사람들도 있고, 매년 생일 선물을 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점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지만, 왜 이곳에서 책을 사 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에둘러 물어보았다. 엄마가 서점을 운영하고 있어 책을 도매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으니, 책이 보고 싶으면 당장 오늘 읽을 책 한두 권만 사는 건 어떻겠냐고, 그 다음 볼 책은 미리 말해주면 구매해 놓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서점을 운영하는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서점에서 책을 사면, 다 읽지도 않았는데 뿌듯해. 그리고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아이의 말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쩌면 나는 서점에서 책을 판매하느라 책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때때로 잊었던 것 같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서점에서 책과 만나는 그 순간을. 내가 몰랐던 책을 발견하는 것, 책의 무게를 느끼고, 책을 들춰 보고, 만져보며 책 앞에 서 있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탐독의 길에 올라선 즐거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서점에서 책을 들춰보고 있었을 아이를 상상해 본다. 책을 고르고 있는 그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웠을 테지. 잠시 생각만 했을 뿐인데 마음이 금세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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