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하고, 정기적금처럼 매달 일정금액을 불입하여 추진해온 제주도 여행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갓 입대한 훈련병의 제대날짜처럼 있을까 싶었는데 코앞으로 다가들자 순식간이다. 카메라장비를 점검하고 가지고 갈 수 있는 배터리의 수를 확인하자 예약한 항공권이 발매된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면세구역을 기웃거리다가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륙과 동시에 날개 끝에 둥실 떠서 뒤따르는 뭉게구름이 지금의 내 마음인양 여겨진다. 호사다마랄까? 일기정보는 2박3일 내내 흐린 날이 예상된다고 보도하고 있다.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
제주도는 2007년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이다. 섬 중앙으로 돛단배의 돛처럼 남한에서 가장 높다는 한라산(해발 1,950m)이 우뚝 솟아있다. 한라산은 높이에 따라 기온 차이가 크게 나기 때문에 다양한 식물이 분포해 있다. 저지대 해안가에는 마을이 발달해 있고, 50m~200m에는 따뜻한 지역에 사는 식물이 자라고, 200m~600m에는 초원 지대가 형성되어 목축업이 발달, 600m~1,400m에는 활엽수림대가, 1,400m~1,600m에는 침엽수림대가, 1,600m이상은 고산지대 식물이 분포한다.
20여 년 전 한라산을 처음 올랐을 때 가이드는 제주도를 표현하는 말로 "한번 구경 오세요!"라고 했다. 이 말은 한라산의 높이인 1,950m을 뜻한다고 했다. 덧붙여 한라산을 한번 오르면 평생 밟은 돌을 다 밟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올라갈 때 낙오자는 즉 패배자, 반드시 올라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정신없이 올랐다. 이윽고 하산 길을 맞아 무수한 돌을 밟는다. '달그락 달그락'돌을 밟는 소리는 정겹지만 정작 돌을 밟는 발은 징글징글하다며 움찔움찔한다.
◆제주 돌 문화공원과 차귀도
첫 번째 코스로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제주 돌 문화공원을 찾았다. 제주 돌 문화공원은 신의정원, 제주 돌 문화 전시관, 제주 전통 돌 한마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량한 들판에 있는 듯 없는 듯 들어선 돌 문화공원이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르면 사진소재가 즐비해서 어디든 카메라만 들이밀면 다 작품이란다. 진위를 떠나 초보자의 알량한 시야엔 아무렇게나 버려진 듯 뜨문뜨문한 돌무더기와 바람에 날리는 새하얀 머리에 억새가 전부다. 삼다(돌, 바람, 여자)의 섬답게 안으로 들어갈수록 돌과 바람의 일색이다.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바람결에 휘휘 눕는 억새들, 그 사이사이를 꿋꿋하게 버티고선 돌들의 군상, 손과 귀가 시리고 입술은 새파래지지만 "너희들이 예술(art)을 아느냐!"며 고뇌하는 예술가처럼 추위를 아랑곳 않고 모두들 열심이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휴대폰의 알람이라면 벌써 울어야겠지만 두서없는 배꼽시계는 시간을 잊은 듯 늑장을 부려 이제야 '꼬루룩, 꼬룩'운다. 대충 시간을 따지자 아침 8시 비행기로 들어와 벌써 오후 1시를 넘기고 있다. 인근 식당에서 시장기를 달랜 뒤 애월읍 바닷가를 찾아 빨간색 등대를 촬영 후 해질 무렵 도착한 곳은 차귀도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어느 해안가다.
차귀도(遮歸島)는 면적 0.16㎢로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딸린 무인도다. 해안 자구내 포구에서 약 2km떨어진 곳으로 배로는 10여분 남짓한 거리다. 섬을 배경으로 일몰이 환상적이라고 했다. 떠날 때부터 우려하고 걱정한 것이 날씨다. 구름은 괜찮지만 비만은 안 된다고 마음속으로 빈 탓인지 빗방울은 꾹꾹 눌러 참는 모양새다. 하지만 하늘 가득히 검은 휘장을 두른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터질듯 하고 바람결은 해동청의 발톱처럼 매섭다. 누구는 바람 때문에 더 멋진 사진이 나왔다고 우쭐해 하지만 바람을 원망한 돌 문화공원은 그나마 양반이다. 이건 아예 삼각대를 넘어뜨릴 기세다. 파도가 거세게 일어 남다른 운치가 풍겨나기는 했다.
◆도와주지 않는 날씨에 허탈
다음날 아침 6시 20분경에 찾은 사진 포인트는 형제 섬이 빤히 바라다 보이는 어느 해변이다. 바닷가란 이름에 걸맞게 거세게 불어오는 해풍은 옷깃을 차곡차곡 여미게 하고 칙칙한 구름무리가 내려앉은 수평선을 보일 듯 말 듯 희미하다. 게다가 바위 둘이 형제처럼 마주한 섬 뒤로 올라붙은 가스층은 방구석을 돌아가는 굽도리처럼 거무튀튀하게 늘어져 수평선을 감돌아 진을 치고 있다. 오메가는 물 건너간 샘이다. 오메가를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 자연의 현상을 어찌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냐고, 한 번에 너무 많은 욕심이라고 마음을 다독이지만 제주도까지 와서란 생각에 가슴엔 바랑구멍만 숭숭하다. 이럴 때는 먹는 것도 설움을 달래는 한 방편이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선지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든 음식이 입안서 착착 감긴다. 그중 구운 생선 두 마리의 뼈를 발라 맛을 보자 혀끝에서는 고소하고 입안에서는 살살 녹아 "아주머니 '제주 옥돔'이예요!"하고 묻는 말에 아주머니는 "'꼬질뺑이'입니다."라고 한다. 덧붙이기를 제주도에서는 옥돔보다 더 많이 먹는 생선이란다. 문득 여수 별미 '군평선이'란 생선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순신장군이 이 생선을 맛보고는 그 맛에 반해 주위를 불러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때마침 관기 '평선'이 지나 길래 즉흥적으로 "'평선'이라 해라!"한 것에서 유래한 것 같아 검색을 한 결과 고즐맹이 즉 필수아미노산이 풍부한 농어목 꼬치고기다.
때늦은 조찬으로 믹스커피 한잔의 달달함을 음미하며 뭉그적거려 나오는 회원들을 향해 "도르멍도르멍 갑세"하자 배웅 차 나선 아주머니가 의외라는 듯 빙그레 웃더니 "늘멍늘멍 갑세!"한다. 빨리빨리 가자는 말에 아주머니는 천천히 가란다.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제주도 방언이 귓전에 이는 춘풍인양 정겹다.
새벽 내내 하늘을 뒤덮어오던 구름무리가 바람결에 밀려나 처삼촌 산소를 벌초하듯 뜨문뜨문하고 그 사이를 비집어 방그레 태양이 웃는다. 간간히 빛나는 태양 볕 아래 산방산과 송학산 사이 지점에 삼각대를 펼친다. 산방산을 배경으로 ND필터를 이용한 바다 장 노출 촬영이다.
◆광활한 들판을 뒤 덮은 억새밭
제주도는 산이 2개로 한라산과 산방산이다. 이중 산방산은 산방산의 밑동을 칼로써 잘라 거꾸로 뒤엎어 한라산 백록담에 올리면 정 맞는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외의 모든 봉우리는 오름으로 제주도에는 360여개의 오름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송학산이 생겨났다.
송악산에는 일제 진지동굴이 있다. 1943~1945년 사이에 만들어진 일본군의 군사시설인 진지동굴은 60여개소나 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저항기지로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란 아름다운 섬에 검버섯처럼 깃든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역사는 역사다. 철거보다는 국력을 튼튼하게 다지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오후 촬영지는 광활한 들판을 뒤 덮은 억새밭이다. 사진이 위주다보니 관광객들은 보이지가 않는다. '코로나19'의 등쌀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다. 사방을 둘러볼 적에 하얗게 머리를 센 억새만 천지삐가리('대단히 많다'의 경상도 사투리)를 넘어 바다를 이루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은 자연만이 만들 수 있다는 진리 앞에 그저 감탄사 연발이다.
마지막 날은 극히 우려한 바가 현실로 나타나 새벽부터 빗방울이 흩뿌리기 시작한다. 날씨의 심술로 성산일출봉과 섭지코지를 거쳐 비자림을 대충 둘러 본 후 특산물 센터 탐방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계획한 100%를 즐기는 여행은 너무 꽉 찬 느낌이라 싫다. 무언가 미진한 듯 자투리 조각일망정 빈구석을 남기길 원한다. 비로 인해 엄벙덤벙한 일정이 훗날의 꿈을 갖게 한다. 그래서일까? 제주도 특산인 똥돼지구이, 대방어회, 오메기떡, 황금향, 천혜향, 육국수 등등은 수박 곁 핥기 식으로 맛을 보았지만 버킷리스트로 계획했던 자리돔회에 쉰다리 한잔의 음미는 덤터기로 건너뛰었다. '다음을 위해'라며 은근슬쩍 본래의 자리에 내려놓은 것이다. 바보 같다 할지 모르겠지만 계영배를 생각한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비행기 안에서 은근슬쩍 쓴웃음을 짓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득 "비의 심술을 다독여 꾸역꾸역 우겨 넣은 카메라에 든 저 많은 사진들 중 몇 장이나 마음에 들까?"하는 기대감에 또 빙그레 미소 짓는다.
글·사진 이원선 시니어매일 선임기자 lwonss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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