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의 핵심 조력자 노태우 전 대통령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12.12 쿠데타, 전두환 친구, 육군사관학교, 하나회, 대구 동화사, 6.29 선언,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 민주화 이후 직선제로 뽑힌 첫 번째 대통령, 88올림픽, 이 사람 믿어 주세요, 범죄와의 전쟁, 베사메 무초, 물태우, 3당 합당, KTX, 인천국제공항, 선경 최종현 회장과의 사돈, 수서비리, 토지공개념, 반역과 부패혐의(정치비자금)으로 얼룩진 징역형 등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노 대통령을 대표하는 가장 큰 상징적 화두는 두 가지 이슈로 압축된다. 그것은 6.29 선언과 북방외교이다.
국내정치적으로 노 전 대통령은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 중 한 명이며 80년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의 핵심이었다. 쿠데타와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한국 현대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반동의 타임이었다. 하지만 그는 87년 국민들이 피나는 민주화투쟁을 통해 요구한 대통령직선제를 전격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정치를 군부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주의체제로 전환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자로 등장했다. 그리고 민주화투쟁이후 직선제에 의해 당선된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노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은 한국정치가 권위주의체제로부터 민주주의체제로 순조롭게 이행하는데 중요한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만일 당시에 노 전 대통령의 6.29 선언과 같은 정치적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큰 혼란과 희생의 피를 흘려야 했을지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것은 북방외교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는 구소련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에 따라 미소양극의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이로 인한 국제환경의 급변에 발 빠르게 대응한 한국외교정책의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었다. 원래 북방정책은 북한, 구소련, 중국, 동유럽 제국(諸國)과 기타 사회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외교정책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북방외교의 범주로는 몽골, 중앙아시아, 유라시아까지도 포함한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북방정책의 핵심을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표현으로 압축하고 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목표로 한 외교정책이었다. 특히 우리가 원하는 통일을 위해 세계 여론을 업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를 상대로 한 전방위 외교가 필요하다는 고심 끝에 북방정책 수행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북방정책의 핵심 추진자로서 역할을 했던 박철언 전 장관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주요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외교에서 공산권을 포함하는 전방위적 세계 외교로의 확장이다. 둘째는 세계무대를 상대로 한 시장개척이다. 공산권까지도 한국의 시장을 확대하여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경제 활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셋째는 북한의 우방과 협력함으로써 북한을 압박하고 북한을 우리와의 협력의 장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통일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행동원칙으로서 북한의 고립화를 지양하며 북방정책과 통일정책의 연계중시, 정치와 경제의 연계, 미국 등 기존 우방과의 관계 중시, 국민적 합의 중시 등의 다섯 가지 원칙을 기초로 하였다.(박철언 2005, 회고록)
결국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통해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고 이를 통한 남북관계개선 및 평화유지, 궁극적으로는 통일달성을 목표로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의 북방외교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한국 외교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첫째, 유라시아 대륙에 위치한 구소련과의 수교를 맺음으로써 한국외교를 유라시아 대륙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육지를 통한 유럽질주를 가능케 한 대륙외교의 성공작이었다.
둘째, 지정학적으로 북한에 접근해 있고 지경학적으로 한국에 유리한 중국과의 수교를 맺음으로써 한국경제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고 북한에 대한 외교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셋째, 해양세력인 미국과의 일방적인 동맹외교, 한미일 삼각안보외교의 축으로부터 벗어나 대륙권 세력인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자주적 외교권의 확립을 구축했다는 점이다. 한국 외교의 저변을 세계무대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이는 탈냉전 세계화시대를 준비했던 개척외교로 평가되며,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우리의 국제적 위상이 격상된 그 배경에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전 세계를 향해 깔아 놓았던 북방외교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결정적 시점도 북방외교의 영향이 컸다. 미소냉전체제하에서 북한의 형제국이었던 구소련과 중국이 하루아침에 한국과 수교관계를 맺음으로써 북한은 순식간에 국제사회의 고아(孤兒)로 전락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1990년 9월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상이 한국과의 수교방침을 통보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한국과의 수교는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는 남조선의 북방정책을 실현시켜 흡수통일을 조장하게 하는 책동에 소련이 협조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조-소 동맹이 유명무실하게 됨으로써 동맹관계에 의존했던 입북 무기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며 핵무기 개발 의사를 암시했던 사실이다. 그리고 1991년 2월 북한 외상 김영남이 탄자니아를 방문하였을 당시 소련이 더 이상 핵안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으나 북한은 이미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획득하기 위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고 탄자니아 주재 미 대사관의 보고서(North Korean Nuclear Potential, 1991.3.11.) 등에서 북한이 핵개발 의지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보고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북방정책이 북한에 얼마나 위협적인 외교정책이었으면 북한이 체제 위협을 느껴 핵무기 개발을 더욱 서둘렀겠는가 하는 점이다. 북한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유지했던 중국 역시 92년 한국과 국교정상화를 맺음으로써 북한으로부터 '배신자'라는 비판까지 감수했다. 그리고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일방적으로 북한 편에 서지 않음으로서 북한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고 이 모든 외교적 힘은 바로 노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이었다. 이런 상태에서도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기본합의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한반도 비핵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등 남북관계에 새로운 신작로를 놓는 역사적인 기초공사를 많이 했다. 이런 노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7.4 남북공동선언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는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안한 '철의 실크로드' 구상으로 연결되었다. 오늘의 북방정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7.4 남북공동선언으로 시작되어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 틀을 구축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때 '철의 실크로드 구상'으로 확장되었다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철의 실크로드 구상은 한반도 남쪽에서 출발한 열차가 북한을 지나 시베리아, 중국, 몽골 내륙을 거쳐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유럽을 통해 지중해 터키까지 연결되는 '대한민국 세계화 구상'이다. 북방정책의 축대를 쌓았던 노 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북방정책의 비전과 구상은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열매는 대한민국 미래세대가 따 먹게 될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6.29 선언과 북방외교정책은 한국 민주주의와 확장외교에 역사적 기여를 한 것이다.

* 필자소개: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이사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이사, 16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 TV조선 장성민의 시사탱크 진행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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