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문학동네 펴냄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찾은 관광객들이 대릉원 주변을 걷고 있다. 매일신문 DB
경주역사유적지구를 찾은 관광객들이 대릉원 주변을 걷고 있다. 매일신문 DB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정용준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선릉 산책'이 나왔다. 2015년부터 올해 초까지 발표한 단편 7편이 실렸다. 선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조선 9대 임금인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걷기 좋아 산책길 추천 선순위에 심심찮게 오른다.

살아서는 권세를 누리고 죽어서는 살아있는 이들의 산책을 북돋우는 조선의 왕은 서울 주변 수도권에 몰려있어 심리적 거리감이 있지만, 원활한 이해를 위해 인용하자면 경주 황남동 주변 대릉원을 떠올리면 비슷하리라 짐작한다.

무릇 능이란 권불십년, 생불백년의 현장 교과서다. 권력이 10년을 못 가고, 삶이 100년을 못 간다. 그런 능 주변을 산 자가 걷는다. 심지어 경주는 능 주변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산다. '더불어 함께'라는 표어를 내밀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지위고하가 없다.

2016년 작가에게 황순원문학상과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안긴 작품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표제작 '선릉 산책'은 그런 의미에서 곱씹게 되는 작품이다. 자폐증을 가진 청년과 선릉을 산책하는 이야기다. 청년의 목에 걸린 표식, 머리에 쓴 헤드기어에서 범상치 않은 동행임을 짐작한다. 그러나 선릉을 걸으며 나무 이름을 모조리 정답으로 귀결시키고, 가벼운 스텝으로 리드미컬하고 유연하게 상체를 움직이는 청년이라면.

장애의 벽을 허물려는 시도는 작품 '이코'에서도 나타난다. 출판사 미메시스에서 그림과 함께 실어 단행본으로 펴냈던 작품 '이코'는 뚜렛증후군이 있는, 틱 장애로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하고 돌출 행동을 하는, 주인공 주우와 학창시절부터 주우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친구 미이를 조명한다. 두 작품 모두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서울 종로구 종묘 정전에서 2020년 종묘대제가 봉행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종묘 정전에서 2020년 종묘대제가 봉행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또 하나의 공간이 소설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스노우'다. 종묘를 무대로 세종과 이름이 같은 문화해설사 이도, 그리고 그의 후배 서유성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다만 종묘가 정상적이지 않다. 서울 대지진으로 불타버린 종묘를 배경으로 설정한다. 명릉에 묻혔다는 숙종의 애묘, 금손이도 이야기 소재로 끌려나온다.

폐허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해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소설집 전반을 관통하는 상호 위로의 궤도에 올라가 있다. '선릉 산책', '이코', '스노우' 뿐 아니라 소설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은 두 사람의 상호 의존과 위로라는 키워드가 관통한다.

상호 위로의 분위기는 '미스터 심플'에서도 이어진다. 올해 김승옥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언뜻 중고물품 거래를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기호 작가의 '최미진은 어디로',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과 닮았다.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함께 근무했던 의료진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예방접종센터에서 함께 근무했던 의료진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작품 '미스터 심플'은 중고물품 거래 플랫폼을 통해 주인공과 '미스터 심플'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전직 관현악단 호른 연주자가 만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그렸다. 원래는 감성적인 '미스터 슬픔'이었는데 뜻밖의 오타로 되레 이성적인 느낌의 '미스터 심플'로 바뀐 그와 거래를 시작한 주인공 역시 헤어진, 지금은 세상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동거인 H의 물건을 내놓는 중이었다.

중고 매매 이력을 보니 미스터 심플은 바이올린, 플루트, 보면대, 악기 거치대, 클래식 CD 등을 내놨는데 알고 보니 미스터 심플도 과거를 정리하는 중이다. 둘은 서로의 사연을 이야기하게 되고 불필요해진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며 동병상련의 핵심인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과정이 이후로 이어지는데, '불필요한 것이 요긴한 것으로 재탄생'하는 중고거래의 핵심과도 맥이 닿는다. 나눔과 공생이라는 요긴한 이야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작가에게 문지문학상을 가져다준 작품 '사라지는 것들'은 "그만 살기로 했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고, 가장 짧지만 밀도높은 임팩트가 압권인 '두부'는 왜 소설집 맨 앞에 수록됐는지 입증하는 작품이다. 작품 '두 번째 삶'이 반전 요소가 강해 다소 결이 다를 뿐, 나머지 작품들은 공감과 위로의 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72쪽. 1만4천원.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