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제칼럼] 박세리와 박세리 키즈

이재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

이재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
이재일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장

얼마 전 우리나라의 남녀 프로골프 선수들이 사상 처음으로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동반 우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며칠 전에는 슬럼프를 딛고 일어선 고진영 선수가 한국 골프 역사 30년 만에 LPGA 통산 200승을 달성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세계 골프의 변방이었던 한국을 아시아 골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은 박세리의 역사적인 경기로부터 시작한다. IMF로 국가 경제가 위기를 맞았던 1998년, 당시 21세로 LPGA 투어 신인이었던 박세리가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했다. 공이 물에 빠져버린 위기의 순간, 신발을 벗고 해저드에 들어가 어려운 샷을 성공시킨 끝에 감격적 우승을 이뤘다. 그녀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갈 때, 고된 훈련으로 까맣게 그을린 다리 피부와 비교됐던 하얀 발이 전했던 감동은 IMF 사태로 깊은 수렁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 절망 속의 희망을 주기도 했다.

더 큰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박세리의 영향을 받은 어린 유소년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대거 골프계에 입문한 것이다. 소위 박세리 키즈라 불리는 이들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성장해 한국 대표로 선발됐고, 최근 한국 여자골퍼로서 연이어 세계 무대에서 우승하는 경이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박세리 키즈의 개념은 비단 골프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타트업의 성지라 불리는 이스라엘에서는 미라빌리스 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라빌리스는 메신저 프로그램의 모태가 된 세계 최초 인터넷 메신저를 개발한 업체로, 창업 19개월 만에 미국 최대의 PC통신 기업에 4억 달러(약 4천700억 원)에 인수됐다. 미라빌리스를 필두로 투자받은 스타트업들이 대성공을 거두며,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신생 기업이 우후죽순 늘어나기 시작했다. 미 경제신문 포브스는 이 같은 창업 열풍을 '미라빌리스 효과'라 표현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국민들은 취직보다 창업이 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창업에 도전하는 청년이 증가해, 현재의 이스라엘은 인구당 스타트업 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스타트업의 선진국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정부는 창업 국가 조성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아, 창업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 왔다. 전국 19개 지역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치해 창업의 전 과정을 지원해온 지도 어느덧 7년이 지났고, 최근에는 스타트업의 고성장을 위해 스케일업 지원에도 힘을 쏟고 있다. 덕분에 투자, 교육, 인프라 등 창업 생태계 전반의 점진적 성장으로 창업 강국의 면모를 점차 구축해 나가고 있다. 그 결과, 2020년 20대 창업 기업은 전년 대비 19.1% 증가한 17만5천 개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고, 한국의 기업가 정신 순위 또한 세계 9위까지 상승하는 등 창업 생태계 전반의 분위기도 개선되고 있다.

이와 같은 창업 생태계의 성장은 우리나라에도 스타트업 성공 사례를 만들어 냈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 형제들은 5조 원에 독일 기업 딜리버리 히어로에 매각되기도 했고, 아랍인들이 많이 사용한다는 앱 하이퍼커넥트는 1조9천억 원에 매각됐다. 간편송금 앱이었던 토스는 한국과 해외에 동시 상장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스타트업 1세대였던 카카오의 성공을 보고 창업에 뛰어든 당근마켓, 어메이즈VR과 같은 카카오 출신 스타트업들이 넥스트 카카오를 꿈꾸며 무섭게 성장하고 있고, 부동산 플랫폼 호갱노노는 이미 엑시트(회사 매각 등을 통해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를 완료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박세리 모먼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창업 생태계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아직 멀다. 증가율이 높아지고는 있지만 전 세계 842개 유니콘 기업 중 한국 기업은 12개로 1%가 조금 넘고, 창업보다 취업을 희망하는 청년이 훨씬 많다. 창업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성공 사례가 필요하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도전을 거듭하는 스타트업들이 포기하지 않고 성공 사례를 창출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창업 시장에 진입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 스타트업계의 박세리 키즈도 쏟아져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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