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서 행복하다

이희범 경북문화재단 대표

이희범 경북문화재단 대표
이희범 경북문화재단 대표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중남미 국가는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경제성장, 투자 감소, 외채 급증 등 심각한 경제위기에 직면했다. 1980년대 중반 연간 물가상승률은 볼리비아 6만%, 니카라과 3만3천%, 아르헨티나 4천924%, 브라질 2천360%, 페루 8천292% 등 대부분이 세 자릿수 이상을 기록했다.

GDP 대비 외채도 볼리비아는 135%, 코스타리카는 100%였고 수출 대비 외채 이자 지급 비율도 브라질은 36%, 아르헨티나와 멕시코는 27%로 대부분 적정률 10%를 넘었다. 1985년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재무장관은 290억 달러의 신용 제공을 제의했으나, 중남미 국가들은 개혁 비용이 너무 크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산유국인 멕시코는 모라토리움까지 선언했다.

당시 멕시코 국무회의는 외채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재무장관은 미국과 전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대부분 채권자가 미국인들이고 더구나 멕시코 외채 중 상당 부분은 자본 도피(capital flight) 형태로 미국 남부 지역 은행에 예금돼 있으니,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과 한 판 붙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많은 각료가 동조했다.

그러나 국방장관은 "만약 미국과 전쟁해 승리하게 되면 미국이 안고 있는 인종 문제, 중동 문제 등 모든 난제를 멕시코가 떠맡아야 한다"고 항변했다. 각료들은 외채 문제를 해결하려다가 세계 문제를 떠맡아야 한다는 국방장관 의견에 동조하면서 미국과 전쟁은 없던 일로 하였다. 물론 외채 문제의 심각성을 희화한 가상 소설이었으나 많은 점을 시사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약속의 땅'이란 자서전에서 "선거운동 기간 중 국가안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혔으나, 그것은 군 최고통수권자가 되기 전 훈수꾼의 입장이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테러와의 전쟁도 나의 전쟁이 되었다.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모시고 게이츠 국방장관을 유임시켰다. 게이츠는 공화당에다 전쟁 불사의 매파였고 내가 혐오하는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인 부시 대통령의 국방장관이었으나, 지금 문제를 해결하려면 덫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술회했다.

지구촌 230여 국가가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로마제국의 멸망, 프랑스혁명 등 굵직한 세계사의 이면에는 민심을 외면하는 지도자들의 아집과 오판이 있었다. 6·25전쟁 당시 황실 근위병을 파견해 우리에게 익숙한 에티오피아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으나, 1974년 쿠데타로 사회주의 군사정권이 들어오면서 정치와 경제는 크게 후퇴하였다.

한때 세계 5위였던 아르헨티나는 과도한 복지와 포퓰리즘 정책으로 국민들은 중독되고 기업들이 등을 돌리면서 수차례 IMF 구제금융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민주주의의 본거지인 영국도 일부 정치 지도자의 선동으로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서 신(新)고립주의를 실험하고 있다.

과거 우리 동네에서 자격은 물론 자질도 턱없는 분이 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 그의 아들은 "우리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떨어지면 우리 집이 망한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그의 아버지는 떨어졌다. 그의 집은 망했지만, 나라는 구할 수 있었다.

한때 여야를 막론하고 20명 넘는 후보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다. 앞으로 5년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선장은 미·중 갈등, 북한 핵문제, 저출산과 고령화, 양극화와 지역 간 불균형 등을 해결하고 '대한민국호(號)'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장관 재직 시 '청년실업 급증, 기업들 투자 의욕 꺾여, 에너지 정책 갈팡질팡' 등의 기사를 보면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식욕도 떨어지고 소화도 되지 않았다. '이 일을 어찌하나' 매일 고뇌의 연속이었으나, 장관직을 그만두자 고민이 해결되었다. 내 책임이 아니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삼라만상도 내가 직접 해결해야 할 주체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진정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가 선택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태산 같다. 이제부터라도 상호 비방하는 흑색 선동이 아니라 국가 장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선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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