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총 대신 우정 '따뜻한' 서부극…퍼스트 카우

유대인과 中 이민자 동거 생활 통해 美 서부 개척기 일상 잔잔하게 담아
타임지 톱10·뉴욕 비평가協 작품상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서부극은 환상이다.

숱하게 리메이크된 OK 목장의 결투도 1881년 10월 26일 툼스톤에서 벌어진 30초도 안 되는 짧은 결투였다. 그것도 정식 대결이라기보다 습격에 가까웠다. '빌리 더 키드'의 전설도 그렇고, 수정주의 웨스턴 또한 환상의 그림자이다.

그럼 진짜 웨스턴은 어떤 모습일까.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2019)가 그런 영화가 아닐까. 아파치의 습격도, 보안관과 악당의 대결도, 영웅주의 무법자의 출현도 없다. 사람들의 옷은 남루하고,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엮었다. 먹을 것도 없어 딸기나 버섯을 따 겨우 속을 채울 정도다.

'퍼스트 카우'는 각박한 자연과 궁색한 인정, 추위와 배고픔이 있는 그런 땅에서 야생화처럼 피어나는 사람의 향기를 시적인 영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서부극이다. 2019년 타임지 선정 최고의 영화 톱 10, 뉴욕 비평가협회상 작품상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퍼스트 카우'가 지난 4일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했다.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격언 문구로 시작한다. 뉠 자리 하나 없는 척박한 땅에서 우정이야말로 최고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닐까. 이 영화가 가려고 하는 지점이다.

1820년 미국 오리건 주. 유대인 쿠키(존 마가로)는 모피 사냥꾼의 식량 배급 담당이다. 그러나 여정이 길어지면서 식량이 떨어져 사냥꾼들로부터 온갖 구박을 당한다. 어느 날 옷도 없이 벌벌 떠는 중국인 이민자 킹 루(오리온 리)를 발견하고 먹을 것과 잠자리를 준다. 몇 년 후 마을에서 만난 둘은 숲 속 오두막에 동거하면서 함께 사업을 시작한다.

빵을 구워 파는 것인데, 사람들은 쿠키의 빵에 매료돼 구운 빵은 금방 동이 난다. 이튿날 사람들은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웃돈을 주고 빵을 사려는 사람들까지 생기면서 대성공을 이뤘다.

진흙길에 작은 솥을 걸어 빵을 튀긴다. 장갑 낀 맨 손으로 빵을 들어내 계피 가루를 바른다. 그리고 은화를 받고 빵을 건넨다. 남자 둘이 서툴게 빚어낸 빵을 어떤 이는 '엄마의 맛'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런던의 맛'이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너무나 절실한 '천상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퍼스트 카우'는 이 빵과 같은 맛을 주는 영화다. 촉촉한 숲 속 풀과 맑은 냇물, 울창한 숲과 바람 등을 영화 속에 그대로 녹여 넣었다. 물소리와 발자국소리, 숲이 일렁이는 소리 등 대사 없이 전해지는 자연의 소리가 영화의 맛을 키운다. 또 인공조명 없이 햇빛과 달빛, 촛불만으로 촬영했다. 화면비도 1.37대 1로 35mm 아날로그 필름의 프레임 비율을 사용했다.

따뜻한 감흥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소박하고 잔잔한 정서적 풍미가 둘이 빚어낸 빵처럼 전해진다.

'퍼스트 카우'는 이 지역에 처음 온 암소를 뜻한다. 빵은 밤에 이 암소의 우유를 몰래 짜 만든 것이다. 마을에 한 마리밖에 없는 암소의 주인인 팩터 대장(토비 존스)이 이들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둘의 앞날도 위태로워진다.

'퍼스트 카우'는 소박한 서부의 일상을 잔잔하게 담은 영화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미국 독립영화의 기둥'이라 불리는 여류 감독이다. 1994년 '초원의 강'으로 데뷔해 드라마틱한 서사 없이도 미국의 현실을 환기시키는 놀라운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가장 미국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영화 '퍼스트 카우'의 한 장면

'퍼스트 카우' 도 미니멀리즘적인 스토리텔링을 가진 영화다. 거창한 서사나 플롯이 없다. 19세기 기회의 땅 미국에서 유대인과 중국인 남자가 만나 마을 암소의 우유를 훔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초기 이주자, 그 중에서도 비주류인 두 남자의 버거운 삶을 전면에 드러내고, 암소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쿠키의 모습을 통해 자연과 공생을 도모하는 노력도 보여준다. 특히 암소를 등장시켜 1820년대 미국 자본주의의 태동을 엿보게 하는 놀라운 상징도 담아낸다.

'퍼스트 카우'는 아주 독창적인 영화다. 우화처럼 응축된 서사와 아름다운 영상, 두 남자가 벌이는 인정 넘치는 서정성이 관객의 가슴을 편안하게 해준다.

판에 박힌 전형적인 영화들에 식상한 관객이라면 꼭 봐야 할 영화다. 스크린 수가 많지 않아 놓칠 우려도 높다. 122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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