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국 옛 사서에는 우리 선조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천제(天祭) 사연이 전한다. 특히 결실의 계절에는 잔치를 벌였고 가무(歌舞)도 빠지지 않았다.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 동예 무천(舞天)이 그렇다. 백제와 신라, 삼한(三韓) 역시 천제를 지냈다고 하니 이들 행사에도 옛 노래가 마땅히 연주됐으리라.
선조들은 어렵고 힘들 때에도 노래를 불렀다. 노동요가 생긴 까닭이고, 전쟁터에서는 병사를 위한 군가(軍歌)도 있었으니 약 35년 간 일제 치하 독립전쟁에서는 더욱 그랬다. 노래로 독립의지를 다졌고 광복을 바랐으니 독립운동 가요, 즉 독립의 노래와 독립 군가는 당연했다. 명멸했던 뭇 독립운동 가요는 나라 안팎으로 퍼져 아직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어떤 노래 불렸나
"대한사람은 우리들이요 총과 칼이야 무서말고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서도 우리 마음은 당할 수 없노라/…/대한사람은 우리들이요 환난고난이 많다 말구요/환난고난이야 아무리 많아도 우리 마음은 넘을 수 없노라." ('대한사람')
"조국강산 사랑하고 동포들이 사랑하여/우리들이 용감한맘 일호라도 변치마세/…/두려움을 떨 때에 어려움을 떨 때에/우리들이 용감한맘 일호라도 변치마세/…/이강산에 우리동포 영원번영 하오리니/우리들이 노래소래 한곡조로 높여보세." ('조국강산')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들을 만났도다/우리들이 만나려고 일편단심 원했지만/어제소식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로/…/살피소서 살피소서 구주예수 살피소서/…/여사선지 작정하고 매운칼로 목을 베어/우군대수 갚으리다." ('만났도다')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3월 22일. 독일 베를린의 포로수용소에서는 러시아군 소속 한국인 포로 3명이 독립운동 가요를 불렀다. 함경도 출신으로 망명, 러시아 군인이 돼 1차 대전에 참전해 잡힌 이들이 부른 독립운동 가요는 독일인 인류학자(프리드리히 빌헬름 뮐러 박사)의 녹음과 독일어 번역 뒤 1925년 책으로 나와 뒷날 국내에서 발굴돼 알려졌다. 이들 노래는 서양음악과 찬송가, 군가(軍歌) 영향의 일본 창가를 차용한 것이었다.
또 '만났도다'는 처음 '안중근가'로 전해졌지만 실제는 1909년 안중근(대한민국장)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동지 우덕순(독립장)의 작품이었다. 즉 안중근이 거사 전 "장부세상에 처함이여 그뜻이 크도다/시세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짓난도다/…/동포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로다/만세만세여 대한 독립이로다"라는 '장부가'로 각오를 다지자 우덕순도 '의거가'로 화답했는데 바로 '만났도다'였다.

이들 노래처럼 항일 가요는 1894년 동학 농민전쟁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끊임없이 생겨 나라 안팎으로 퍼졌다. 동학혁명 때는 최제우 동학 창시자가 1860년 지은 '칼노래'(劍歌)가 불렸다. 민중은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를 읊거나 '새야새야 파랑새야'로 저항했고 광복 때까지 항일 노래로 정신을 무장했다.
일제 만행과 침탈 때마다 의병들은 일어나 '국가'(國歌) 같은 애국 노래를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에는 '영화로다 영화로다 이내죽음 영화로다'라며 죽음으로 맞서는 '생욕사영가'(生辱死榮歌) 등을 지어 합창했다. 또 자결 순국한 민영환 애국지사를 기리고 '독립정신 기를세라'고 호소한 '민충정공추도가'도 부르며 저항했다.

1910년 경술국치에는 청년 학도를 향해 '소년남자가', '소년모험맹진가', '용진가', '전진가', '학도가' 등으로 분발을 호소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상해 임시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의 새 기운이 퍼지자 결사전 등을 외치는 항일 노래가 나왔다. 의열단과 광복군 창설 등에 맞춰 혁명을 외치는 '선봉대', '유격대행진곡', '조선혁명군', '혁명가' 등의 노래도 이어졌다. 이처럼 강점기 내내 항일 노래는 번졌고,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도 숱했다.
◆누가 작사·작곡했나
독립운동 노래와 독립 군가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일제 치하, 6대주 12억 세계인에 섞여 일제 5,000만~1억명에 맞선 한국인 2,000만~3,000만명과 그 10%쯤인 애국지사가 애창한 독립군가는 헤아릴 수 없다. 이에 대한 한 연구(허영춘 박사학위)는 한중(韓中) 출판 자료로 일부 파악한 독립운동 노래를 1,263곡으로 추정했다.
이는 앞으로 연구 발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 음악전공 한국인이 모자라 독립운동 가요의 한국인 작곡자는 소수에 그쳤고, 작사자는 많이 전하지만 원작자를 알 수 없는 노래도 수두룩해서이다. 독립운동 가요의 곡조(선율) 경우, 일본이 전파한 창가와 서양 찬송가, 중국, 러시아 등지의 음악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후 점차 음악을 배운 애국지사가 작사·작곡한 독립운동 노래가 두루 불렸다. 이런 현상에 대해 중국 흑룡강성장 진뢰(陳雷)의 부인이자, 여성 항일사에 이름을 남긴 이민(李敏) 애국투사나 『항일음악 330곡집』의 편저자인 고(故) 노동은 교수는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아 우리들의 무기로 사용한 것과 같다"는 평가를 했다.

한국인 작사자로는 "간다 간다 나는 간다/너를 두고 나는 간다/잠시 뜻을 얻었노라/…/너를 위해 일하리니/나간다고 슬퍼마라/…/부디부디 잘있거라/훗날 다시 만나보자/나의 사랑 한반도야"의 '거국행'(去國行)을 작사한 안창호(대한민국장) 등 인물이 많다.
한국인 작곡가는 안창호의 '거국행'을 작곡한 이상준(李尙俊)과 안창호 작사의 '학도가'를 작곡한 이성식 등이 있다. 또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어/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는 자신의 작품('최후의 결전')을 편곡한 경남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윤세주(독립장) 지사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 이름이 전한다.

대구 출신인 이두산·이정호 부자도 돋보인다. 이두산 작사·작곡에는 '광복군가'와 '선봉대'가, 이정호의 작사·작곡에는 '광복군 제1지대가'와 '혁명가', '중국의 광할한 대지 위에'가 있다. 이두산의 '선봉대'는 원수를 물리치자는 독전가로, "백두산이 높이 솟아 길이 지키고/…/우리들은 삼천만의 대중 앞에서/힘차게 걷고 있는 선봉대다"로 끝난다. 이정호의 '혁명가'는 의열단 창립일(11월 10일) 등에 불렸고, "동무들아 굳게굳게 단결해/생사를 같이 하고/…/우리들은 피끓는 젊은이/ 혁명군의 선봉대"로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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