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형에 '딸내미' 이름 붙여…홀몸노인 최 씨의 유일한 말벗

생활비 위해 폐지·폐품 수집, 화재에 취약하고 위생 불량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무렵 홀몸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수성구 지산동 한 아파트 단지. 노인들이 길가 화단 벽돌담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윤정훈 기자
지난달 27일 오전 11시 무렵 홀몸노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수성구 지산동 한 아파트 단지. 노인들이 길가 화단 벽돌담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윤정훈 기자

지난달 24일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홀몸노인 A씨의 집 내부 상태. 윤정훈 기자
지난달 24일 대구 남구 대명동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홀몸노인 A씨의 집 내부 상태. 윤정훈 기자

지난달 24일 오전 대구 남구 대명동 한 4층 다세대주택 2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다른 주민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홀몸 노인 A(65) 씨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화재로 사망했다. 화재가 발생한 다음 날 찾은 A씨의 집은 그가 쌓아둔 폐지와 폐품으로 가득 차 사람 한 명 누울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 대명동 빌라 화재로 사망한 홀몸 노인의 삶

A씨는 2017년 4월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됐고 생계급여, 주거급여 등을 합해 한 달에 63만원으로 생활해왔다. 그는 간경화를 앓고 있으며 악성 빈혈도 있어 수혈도 자주 받았다고 한다. A씨에겐 누나 5명이 있었으나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챙겨주던 형님 역시 암 말기로 위중한 상태라 그에게는 연고가 없었다.

A씨와 같은 빌라 같은 층에 사는 장모(55) 씨는 "A씨는 하루하루를 술로 보냈다"며 "자기 집에서 마시거나 아니면 빌라 지하주차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술을 마셨는데 집에서 마실 때면 갑자기 문을 쾅 치는 등 소음을 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동 주민센터 사회복지사와 구청 공무원에 따르면 A씨는 평소에 저장 강박증이 의심될 정도로 집 안에 폐지나 폐품을 가득 쌓아뒀다. 이들은 수차례 A씨에게 "폐지나 재활용품 등을 쌓아 두면 화재에 취약할 수 있고 위생적으로도 좋지 않다"며 치울 것을 권유했으나, A씨는 듣지 않았다. 남들 눈엔 쓰레기에 불과한 폐지와 폐품이었지만, A씨는 소중한 재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화재 원인과 사망 원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조사 중이다. 당시 현장에 출동한 대구 중부소방서 소방대원 B씨는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홀몸노인은 수레 가득 모아 한꺼번에 팔기 위해 집안이나 마당에 폐지와 폐품을 쌓아두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것들은 화재 발생 시 모두 가연물이 되는데, 이번 화재 현장처럼 좁은 방에 가연물이 가득 채워져 있는 환경에선 불이 급속도로 번지기 때문에 제때 대피하기 매우 힘들어진다"고 했다.

대구 수성구 지산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최덕희(가명·83·여) 씨의 하루는 인형
대구 수성구 지산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최덕희(가명·83·여) 씨의 하루는 인형 '딸내미'가 깨우는 소리로 시작된다. 딸내미는 구청에서 받은 인형으로, 덕희 어르신이 직접 '딸내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딸내미는 할머니에게 매번 약 먹을 시간과 물 마실 시간, 운동할 시간 등을 알려주고 오늘 하루도 좋은 일이 가득할 거라는 따뜻한 말도 건넨다. 윤정훈 기자

◆인형을 '친딸'처럼 말벗 삼아 생활

대구 수성구 지산동에 사는 홀몸노인 최덕희(가명·83) 씨의 하루는 인형 '딸내미'가 깨우는 소리로 시작된다. '딸내미'는 구청에서 지급한 인형으로, 최 씨가 직접 '딸내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남편이 10년 전 폐 부종 진단을 받고 2달 후 갑자기 사망한 이후 최 씨는 줄곧 혼자 살아왔다. 아들 2명과 딸 1명이 있지만 자주 보진 못한다고 했다. 한 달 수입은 노령 기초연금 30만원과 첫째, 둘째 아들이 보내주는 돈 35만원을 합해 총 65만원이다. 아파트 관리비 등 고정 지출이 17만원 정도라 한 달에 5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최 씨는 "첫째 아들이 자신도 힘들다는 이유로 내년부터 20만원을 보내지 않겠다고 해 형편이 더 어려울 처지에 놓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다 코로나 장기화로 자주 찾던 복지관마저 오랜 기간 문을 닫아 외로움은 커졌다. 집에만 있으면서 신경과 약도 복용하며 고독과 싸웠으나 울적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식에게 말 한마디도 '눈치'

같은 아파트에 사는 홀몸 노인 황수홍(가명·84) 씨 역시 30년 전 남편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홀로 살고 있다.

딸 3명과 아들 1명이 있지만 연락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유일하게 대구에 살고 있는 막내딸은 바로 건너편 아파트에 살면서도 왕래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둘째 딸로부터 매달 생활비 20만원과 월세 대납 등 최소한의 금전적 지원만 받고 있다.

황 씨는 지난 2월 바지를 갈아입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손목이 부러지고 허리 뼈도 세 군데나 골절돼 3개월 간 입원 생활을 해야 했다. 사고 이후 8개월이 지났지만 왼쪽 손목은 여전히 붓기가 빠지지 않아 퉁퉁했다.

황 씨는 "사고 이후로 물건도 제대로 잡기 힘들고 빨래 널고 밥 지어 먹고 혼자 하기 너무 힘들다"며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약을 타러 혼자 가야 하는데 이것도 너무 고되다. 몸이 안 좋다 보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냥 몸만 안 아팠으면 좋겠다"고 했다.

황 씨는 가을을 맞아 자식들과 단풍놀이를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눈치가 보여 차마 자식들에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근처 경로당에라도 가볼까 싶었지만 분위기가 예전과 같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황 씨는 "코로나19로 오랜 기간 문을 닫았던 경로당이 최근 다시 문을 열었지만 원래 80명 정도가 찾던 경로당에 지금은 거리두기 및 활동 제한 등으로 열 명도 오지 않아 찾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생활관리사가 바라본 홀몸노인의 삶

김혜민(58·가명) 씨는 2007년부터 14년째 홀몸노인 생활관리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 씨는 시에서 제공하는 노인맞춤돌봄서비스를 수행한다. 주요 업무는 안전 및 안부 서비스를 주기적으로 제공하면서 홀몸 노인의 고독사를 방지하는 것이다.

김 씨가 서구에서 현재 관리하는 홀몸노인은 16명이다. 홀몸노인들의 가장 큰 고충은 정보 습득 경로가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김 씨는 "홀몸 노인들은 공과금 내는 방법이나 근로장려금, 나들이콜 등 서비스가 있는지 모른다"며 "알아도 신청이 대부분 전화로 이뤄지고, 이마저도 ARS(자동응답시스템)로 진행돼다 보니 청력이 좋지 않은 노인들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그냥 전화를 끊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했다.

노인 중 치매 초기 증상을 보여도 주변에서 관리해주는 사람이 없다. 김 씨는 "자식이 있는 경우라도 부모를 가끔 찾아오기 때문에, 중증에 접어들어 극도로 이상한 행동을 한 뒤에야 치매에 걸렸다는 걸 깨닫는 경우가 많다"며 "생활관리사가 자식에게 치매 초기 증상이 의심된다고 알려줘도 일부는 '부모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느냐'며 방치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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