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자기를 화장하고 나면 남은 유골을 화분으로 만들어달라고 했었다. 그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워낙 자주 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무심코 '그럴게요'라고 대답했고 '잠깐 이거 이상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아버지의 유골함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작중 주인공만 그랬던 게 아니다. 첫 줄을 읽는 순간 뭔가 께름칙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유언으로 유골을 화분에 옮겨 심어달라고 할 때는 물감에 섞어 벽이나 어딘가에 뿌려달라고 한다거나 화분을 게이트웨이 삼아 차원 이동을 시도하는 등 어찌됐든 단지 화분을 유골함 용도로 쓰는 건 아닐 거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유골이 담긴 화분에서 쑥쑥 나무가 자라고, 말을 하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고, 급기야 이성(異性)인 화분과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유혹하는 데 성공하고, 종국에는 화분 주인들까지 한 집에서 산다. 시어머니가 곧 새엄마가 되는데, 식물인간 말고 화분에 담긴 식물 상태다.
판타지의 영역으로 들어갔는데 막장 족보로 한번 더 넘어가면 '이거 도대체 선을 몇 번 넘는 건가' 싶다가도 재미있게 읽히니 '아침드라마 작가들이 곡소리를 내겠구나' 생각했다. '이걸 쓴 작가는 도대체 누군가'라며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한 번 더 본다. 이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고른 성석제, 편혜영, 조해진, 정용준 작가와 오혜진 평론가도 다시 보게 된다.
작가 이유리를 세상에 알린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빨간 열매' 등 여덟 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가 나왔다. 쌓아둔 마나를 한방에 터트리듯 이유리 작가는 등단 직후인 지난해 봄부터 최근까지 작품들을 쏟아냈고 기어이 첫 소설집까지 묶어냈다.
'빨간 열매'에서 기묘한 판타지를 접하며 나머지 작품에도 언제든 대반전이 있을 거라 직감한다. 말하자면, 외계인이 한번은 등장할 텐데, 어디쯤에서 나오나 예측하며 보게 되는 거다. '둥둥', '브로콜리 펀치', '손톱 그림자(원제는 '손톱 조각')', '왜가리 클럽', '치즈 달과 비스코티', '평평한 세계', '이구아나와 나'까지 뭐 하나 기묘하지 않은 게 없는데, 그나마 '왜가리 클럽'이 현실 영역에 머문 순한 맛에 속한다. '빨간 열매'의 막장 족보는 사실 일련의 작품들이 판타지 영역으로 어느 때든 돌입할 수 있다는 알림음 역할이었던 것이다.

표제작 '브로콜리 펀치'도 더하면 더했지 '빨간 열매'에 버금간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다. 그의 직업은 복싱 선수다. 그런데 이게 특이하긴 하지만 영 없는 사례가 아니라는 게 반전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잘 쉬고 잘 먹고 마음 푸근히 먹으면 개선된다는 처방전도 있다.
작품 속 판타지는 그저 작가 자신이 재미있으려고 들여온 게 아니다. 착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환상과 초능력은 작중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할 때 생긴다.
▷자신이 키워낸 아이돌을 지켜내겠다며 트렁크를 안고 인천 앞바다에 둥둥 떠있는 누나의 '둥둥'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미워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증오를 만들어내던 복싱 선수의 '브로콜리 펀치' ▷가정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비현실적 형체로 전환돼 조우하는 계모와 딸의 '평평한 세계' ▷왕따였던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 돌멩이를 친구로 여기는 30대 아저씨의 '치즈 달과 비스코티' ▷전 남자친구가 쓰레기 남겨놓듯 두고 간 이구아나와 소통하며 그걸 조련하는 수영강사의 '이구아나와 나'까지 모두 그랬다.
판타지 요소가 듬뿍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소설집이 친숙하면서도 시원시원하게 읽히는 건 손가락에 힘을 뺀 덕분이다. 1차원적 표현이라 느낌과 동시에 적확한 표현이라 무릎을 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의사, 또는 치료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환자의 시간을 개똥으로 여기라는 교육을 받는 게 틀림없다', '날씨는 더 맑을 수 없이 맑았고, 바람은 더 시원할 수 없이 시원했다', '걱정마세요, 저 아무것도 안 보고 안 들었어요. 당연히 그 말은 볼 거 다 보고 들을 거 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등은 생활 속 문장이었다.

한줄 평으로 바꾼다면 '읽어가면서 남아있는 페이지가 얼마 안 돼 아쉬워지는 소설집'이다. 맛있는 밥을 먹을 때 밥이 줄어드는 것이 슬퍼 울었다는 미식가들의 표현을 믿기 어려웠으나 이제부터 믿기로 한다. 오죽하면 선배 소설가도 약장수 모드로 바꿔놨을까. 다음은 구병모 작가의 표현이다.
"평소 같았으면 나는 이 자리를 좀더 진중하고 고상한 응원과 기대의 말로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엽록소가 넘치는 상상력에 광합성의 언어와 개성이 풍부한 인물 묘사를 비롯해 그냥 '오다 주웠다' 모드로 별것 아니라는 듯이 투척하는 유머와 위트 또한 일품이어서 어느 쪽으로든 꼽을 수 있는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그런데 이렇게 골고루 재미있는 소설을 본 이상 품위있는 표현을 내려놓고 약을 팔아야만 하겠다. 됐으니까 일단 한번 잡숴봐, 이 빨간 열매를" 304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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