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빛 아래 감나무 가지에 달려 선홍 빛깔로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은 반시가 가을바람에 흔들거린다. 시월생 엄마라 그런지 유난히 홍시를 좋아했던 엄마.
몇 년 전 반시가 무르익는 청도에 마련한 아담한 시월산방(枾月山房)의 툇마루에 걸 터 앉아 홍시가 열리는 감나무를 쳐다볼 때는 늘 엄마의 추억과 엄마의 그리움을 그려본다.
어린 시절 툇마루에서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노라면 머릿결을 쓸어 주시던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그립고, 늘 바르게 살아라, 늘 거짓 없이 대하라, 늘 나누고 살아라, 늘 아끼며 살아가란 잔소리가 그립다.
내 기억에 단 한 번도 엄마는 회초리를 들지 않았다. 듣기 싫지만 잔소리는 늘 엄마의 무릎에 누웠을 때만 잔소리를 한다. 철들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우리 엄마만의 자식에 대한 훈육이었다.
엄마는 고집 센 성씨로 소문난 진주 강(姜) 씨의 일곱 남매 맏딸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어려운 살림살이에 일곱 남매를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키워내신 외유내강형이자 한국의 어머니 상(象)이었다.

막내로 태어나 유난히 개구쟁이였고 골목대장이었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삼성)의령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고 다녔지만, 학창 시절 때는 공부가 어찌 그렇게 하기 싫었던지 시험 전날 만 공부한 것 같다만, 부모님은 대학원까지 공부하기를 원하셨다.
스물여덟에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셨고 살짝 철들 무렵인 서른이 넘어 대학원에 입학했다. 석사학위를 받았을 때 엄마의 환한 얼굴과 경로당에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막내아들 자랑하시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었지만, 막상 내가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는 엄마는 사랑꾼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그 강을 건너신 후였기에 학업에서의 마지막 효도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엄마는 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웃을 대했고 부랑인들에게는 구수한 욕으로 듣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만든 욕쟁이기도 하셨다. 무학으로 한글을 깨우치지는 못했지만 글자를 모형으로 외우셨고, 숫자에 밝아 암산하는 실력은 탁월했다. 없이 사는 이웃을 위해 사셨고, 친인척과 주변인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적이 없었고, 비수를 찌르는 말 한마디 한 적 없이 사셨다.
1972년도 전설적인 TV 인기드라마 '여로'가 방영될 당시 아버지 몰래 엄마의 비상금으로 TV를 사셨던 일명 큰손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국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象)으로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고 93년의 삶을 곱게 사셨다.

2021년, 붉은 빛깔로 무르익은 반시가 걸려 있는 만추의 11월은 엄마의 100세가 되는 해이다. 참으로 그립고 보고 싶다. 외유내강으로 사셨던 엄마의 삶을 닮고 싶고, 사랑꾼 아버지를 닮고 싶다.
늘 엄마의 무릎에 누워 잔소리 같은 교육을 받았고, 아버지에게는 밥상머리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기에 대학에서 겸임교수로서 후진을 양성시켰다. 현재는 고령자,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 주거환경을 개선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공익사업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교육의 영향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흔 쯤에 '세월 금방이다' '헛된 시간 보내지 마라' 라는 엄마의 말씀을 그때는 몰랐는데 육십이 다가오니 일일이 여삼추(一日 如三秋)가 아니라 여삼추가 일일(如三秋 一日)같이 세월이 참 빠르게 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주렁주렁 열린 홍시를 보며 시월산방 툇마루에 걸터앉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리운 엄마의 사진을 만지작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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