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는 이곳저곳 여행하며 확보한 물건들이 꽤 있다. 그림이 아닌 여행 사연이 담긴 일종의 전리품이다. 아니, 화가의 작업실에 당연히 작품이 많아야 하지만 꼼꼼히 둘러보니 '있었던 것도 어느 순간 없어지는' 알 수 없는 부재가, 영원의 알레고리가 나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오래전 일본에서 친구에게 받은 마스크가 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다. 산산조각이 나 깨진 걸 조각조각을 붙여 놓은 상태다. 마스크는 하얀 피부에 초점 없는 눈동자와 빨간색 입술을 그려 놓은 모습이다. 이것을 보면 떠오르는 추상화에 대한 두 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부토 춤이고 또 하나는 영화 이야기다.
어느 해 일본, 후쿠오카 미술관의 오픈 세리머니는 일치감치 흥미로웠다. 내 마음을 쏙 빼앗아 놨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때 나는 그 춤을 처음 보았는데 기이한 분장이 아찔해 보였다. 미술관 바닥에 커다란 캔버스천이 깔리고 드로잉을 할 일본의 남자 화가와 여자 무용수가 나왔다. 퍼포먼스가 시작되었다. 무용수 얼굴에 바른 새하얀 분가루가 근육의 이완으로 움직일 때는 묘한 흡입력까지 들었다.
부토 춤이었다. 살아있는 영혼의 춤이라고도 불리는 부토 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일본에서 자신들의 허무주의를 예술로 승화시킨 퍼포먼스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어떤 부재에 대한 의식이다. 소리도 배경음악도 없고, 내레이터도 없이 춤추는 젊은 여인과, 목탄으로 드로잉을 하는 작가의 동작만 있을 뿐인데 서로 다른 듯 닮은 듯이 느리고 또 느린 공연이다.
무용수는 뽀얗게 칠한 백색의 가루로 얼굴에 분을 바르고, 새빨간 루즈는 입술 크기의 반쪽을 조그맣게 그려놓았다. 마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보여 몹시 생경한 모습이다. 또한 하얀 옷과 새빨간 목도리의 색상 대비는 강렬하다. 둘의 어울림이 손끝과 발끝으로 이어지고 몸의 행위들은 관객들의 몰입을 한층 높인다. 무용수의 동작을 따라 화가의 도로잉은 잘 차려진 추상화로 마무리되었다. 분명 세상에서 사라진 누군가에게 하는 의식 같았다.
공연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무용수는 뽀얀 얼굴의 땀을 훔치며 숨이 가쁘다. 드로잉 퍼포먼스를 한 작가에게 다가가 살짝 물었다. "이 드로잉 작품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시가 끝난 뒤 소각합니다." 나의 짐작 그대로였다.
또 다른 부토 춤에 대한 얘기, 어머니의 부재를 부토 춤으로 극복해가는 젊은 여성 댄서가 나오는 독일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다. 영화는 곧 다가올 남편의 죽음을 고민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등진다. 남편은 갑작스런 아내의 부재로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찾아 떠난다. 벚꽃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공원에서 부토 춤을 배우며 아내와 교감하는 장면이 크게 인상적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한 건 부재의 추상이다. 오늘 있던 것이 내일 갑자기 소각되고 사라진다. 그건 어쩌면 돌이킬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는 사라진다는 '메타포'(은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나의 작품을 포함해 '영원히'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버릇이 내게는 있다. 화장실 벽에 이런 메모를 해두었다. '부재의 추상성,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 롤랑바르트의 애도일기에 나오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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