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이 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윤동주, 별 헤는 밤)이,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정호승, 봄길)이 그렇다.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최백호, 낭만에 대하여)이면 또 어떠랴.
독일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1901~1992)는 내게 그런 이름이다. 할리우드 키드였던 여드름투성이 까까머리 소년의 첫사랑! 히틀러에 반대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불후의 반전(反戰) 가요 '릴리 마를렌'(Lili Marlene)으로도 유명하다.
'주말의 명화'였는지 '토요명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에게 빠진 건 '검찰 측 증인'(1957)이란 흑백영화에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빌리 와일더 감독이 각색했다. 국내 개봉 제목은 '화끈할 수도 있고, 확 끌기도 하는' 우리말 '정부'(情婦)였다.
백미(白眉)는 반전(反轉)을 거듭하는 후반부다. 당시 50대 중반이던 디트리히는 살인 혐의를 받는 남편을 위해 재판정에서 일부러 위증(僞證)을 하는 아내로 열연한다. 미국영화연구소(AFI)가 선정한 '위대한 법정 드라마 6위'가 오히려 야박하게 느껴질 정도다.
겨울 문턱에서 문득 디트리히가 생각난 건 '검찰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원내 1, 2당 모두 이번 대선에서 가장 큰 리스크는 검찰(또는 특별검사·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경찰) 수사 결과다. 돈과 권력에 얽힌 추잡한 욕망들이 만천하에 까발려질지 모를 일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본인과 가족, 측근 관련 사건은 모두 8건에 이른다. 특히 공수처는 이미 지난 9월에 그를 직권남용·권리행사 방해, 공무상 비밀 누설 등의 혐의로 입건했다. 검찰총장 재직 당시 발생한 이른바 검찰의 '고발 사주' 의혹과 관련한 수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몇 달째 '대장동'에 발목이 잡혀 있다. 사건 핵심 관계자들이 잇달아 구속된 데다 최근에는 자신의 국정감사 위증 논란까지 불거진 상태다. '윗선' '그분'에 대한 수사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게 야당들의 공격 포인트다.
그놈이 그놈이란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공공 문제에 대해 선한 사람들이 무관심하면 그 대가로 악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플라톤의 일갈처럼 비호감 인물뿐이더라도 투표를 잘 해야 마음고생이 덜 하다. 유행가 가사처럼 바보 놈이 될 순 없는 노릇이다.
대권주자들을 겨냥한 수사가 대선 전에 마무리될지는 불투명하다. 언급한 영화에서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대의(大義)를 위한 행동에 나선다면 모를까. 적어도 내년 대선이 후대에 영감(靈感)을 주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멋진 과정이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여야의 포퓰리즘 경쟁이다. 한 표 한 표가 절실한 박빙 승부가 되어갈수록 현금 살포, 공짜 복지 공약 등 달콤한 사탕발림에 대한 유혹은 커질 테다. 코로나19는 백신에 이어 치료제까지 개발됐지만 '위드 포퓰리즘'에는 백약이 무효다.
지난해 미국 대선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열광하는 트럼피즘(Trumpism)은 세계 초강대국의 뿌리까지 갉아먹고 있다. '미국이 돌아왔다'를 내세웠던 조 바이든 대통령은 3년 뒤엔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정도로 그 벽 앞에 무력하다.
유권자들의 검증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보수·진보를 떠나, 우리 미래를 믿고 맡겨도 좋을 그릇인지를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주여!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