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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현장] 슬픔도 미룰 수밖에 없는 산재 유족의 처지

임재환 기자

임재환 사회부 기자
임재환 사회부 기자

4개월. 경북 칠곡 쿠팡 물류센터에서 과로사한 고(故) 장덕준 씨의 산업재해가 인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산재를 산재로 인정받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관련 기관에선 "오히려 빠른 편"이라고 했다.

아들 장 씨를 떠나보낸 유족은 닦아도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멈춰야만 했다. 산재 인정으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생전 장 씨가 쿠팡에 대해 했던 말들을 되새기며 과로사로 판단했다. 하지만 산재를 증명하는 곳곳엔 어깃장이 놓였다.

산재 조사에 필요한 서류가 원활하게 접수되지 않아서다. 과로사로 인한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업무부담 가중요소나 업무 시간 초과 등 업무와 질병 간의 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근로복지공단에 따르면 산재 사망 인정을 위한 구비서류는 유족 측의 사망진단서(사체검안서)와 가족관계증명서, 그리고 사업장 측의 재해자 임금대장과 근로계약서 등이다.

문제는 사업장의 서류 제출이 의무가 아닌 탓에 산재 인정은 지지부진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장 씨 유족도 그랬다. 유족은 구비서류를 제출했으나, 쿠팡은 근로계약서만 제공하고 임금대장은 순순히 내놓지 않았다. 모든 서류 구비는 온전히 유족의 몫이었다.

장 씨 어머니 박미숙(53) 씨도 서류 구비를 위해 외로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쿠팡에 목놓아 임금대장을 요구해도 침묵하는 모습에, 아들의 1년 4개월간의 급여통장을 역추적해 의문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자료를 만들었다. 하지만 임금대장 서류가 아닌 탓에 또 한 번 좌절했다. 국회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산재가 인정됐다.

산재는 100일이 넘는 시간을 유족에게 대가로 요구했다. 유족에겐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시간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자료 제출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는 사업장도 문제가 있어 보였으나, 산재 인정을 담당하는 근로복지공단이 사업장에 적극적인 행정을 펼쳤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공단이 산재 조사 과정에 필요한 서류를 사업장에 적극적으로 요청함으로써 4개월이라는 시간을 단축할 순 없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단은 유족의 고통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얼마 전 기자가 접촉한 공단 관계자에게 장 씨의 사례를 전하면서 들은 답변은 "4개월 정도면 산재 인정치고는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시간이 더 소요되기도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유족이 슬퍼해야 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데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 씨와 같은 과로사 산재신청 건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과로사 산재신청 건수는 2017년 576건에서 2018년 612건으로, 2019년 747건으로 늘었다. 지난해는 코로나 여파로 670건으로 감소했으나, 올해는 1~7월 사이 438건으로, 이 추세라면 지난해 건수를 넘을 전망이다.

과로사 산재 관련 분쟁이 계속 늘어나는 현시점에서 또 다른 유족은 서류 준비에 한창이다. 장 씨 유족처럼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을 흐느끼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가장 아쉬운 대목은 산재 조사 과정에서 사업장의 서류 제출이 법적 장치로 의무화돼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유족이 가족을 잃은 슬픔에 좀 더 잠겨볼 수 있지 않았을까. 장 씨의 유족은 '사업장의 산재 서류 제출 의무화'를 기자가 취재하는 동안 내내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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