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영화 '핀치'

영화 '핀치'의 한 장면
영화 '핀치'의 한 장면

외로운 계절이다.

사람이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로운 것이 인간이라는 굴레다. 무인도에 표류해 배구공 윌슨을 의인화해 대화를 하던 '캐스트 어웨이'(2000)의 톰 행크스가 그런 인간의 숙명을 잘 보여준다. 망망대해에서 윌슨을 떠나보내며 오열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만약 지구가 멸망해 혼자만 남았다면 어떨까. 톰 행크스는 또 다른 윌슨을 만들어낼까. 영화 '핀치'(감독 미구엘 사포크닉)에서 톰 행크스는 로봇을 만들어낸다.

영화 '핀치'는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애플TV가 지난 주 공개한 영국 SF영화다. 몇 차례 개봉을 추진했으나 결국 애플TV에 판매돼 전 세계에 공개됐다.

지구가 멸망했다. 환경오염으로 오존층이 파괴돼 모든 생명체가 사라졌다. 핀치(톰 행크스)는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인간 중 하나다. 오늘도 그는 로봇 강아지 듀이와 함께 생필품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두꺼운 방호복을 입은 그는 돈 맥클린의 팝송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며 익숙한 듯 움직인다.

곧이어 거대한 모래폭풍이 몰려온다. 일상화된 지구의 모습이다. 지구는 더 이상 삶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햇볕에 노출되면 금방 살이 타버린다. 밤에 움직이면 안전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이다. 얼마 안 되는 생존자들은 이제 살인과 절도를 서슴지 않는 괴물이 됐다.

영화 '핀치'의 한 장면
영화 '핀치'의 한 장면

핀치는 TAE 테크놀로지라는 회사에 소속된 엔지니어다. 살아 있는 개 굿이어, 로봇 강아지 듀이와 함께 벙커에 산다. 그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족 로봇을 만든다. 듀이의 카메라 눈을 이식하고, 프로그램을 심어 드디어 로봇이 완성된다.

"내 말 들려? 이해되면 고개를 끄덕여"

로봇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전자음으로 된 목소리를 낸다.

'핀치'는 아포칼립소 지구인이 로봇과 강아지를 데리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향해 가면서 벌어지는 여정을 그린 SF로드무비다. 대단히 황량한 지구와 황폐화된 인간성 속에서 따스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영화다. 사람이 아닌 로봇을 통해서 말이다.

이족 로봇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면서 살피고 챙겨야 할 반려자다. 말과 걷는 것을 가르치고,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준다. 슈퍼컴퓨터와 같은 연산능력과 지구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로봇은 인간의 삶이 초보이고, 철부지이다.

어느 날 드디어 로봇의 이름이 필요해졌다. '아인슈타인'이 좋다는 로봇에게 '제프'를 제안한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어떠냐는 로봇. "그 사람은 작아. 넌 크잖아. 그냥 제프로 해." 드디어 배구공 메이커 윌슨처럼 이름이 생겼다.

핀치와 제프는 세상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반자다. 지구가 멸망한 이유를 묻는 제프에게 핀치는 인간의 오만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분별한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참극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줄기 희망을 건져 올린다. 먼 옛날 금을 찾아 서부로 향하던 프론티어들처럼 금문교를 찾아간다.

영화 '핀치'의 한 장면
영화 '핀치'의 한 장면

'핀치'는 여느 아포칼립소 영화들처럼 인간성 상실과 지구 멸망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처절한 생존 일기가 주된 플롯이지만 '핀치'는 액션과 긴장이 아닌 다른 내러티브를 쓴다.

로봇과 인간의 교감을 마치 아버지와 아들의 서사로 그려내는 것이다. 핀치는 걷는 법과 생존하는 법을 가르치고, 제프는 굳건한 육체로 핀치를 돌본다. 제프는 끊임없이 말썽을 저지르는 아들이다. 태어나 궁금한 것이 많은 유아기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육체는 쇠락한다. 그 곁을 지키는 것은 철부지 아들이고, 그가 아버지의 희망을 실현시킨다. 아버지는 존엄을 잃지 않고, 아들은 지구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교감 대상이 생명체가 아닌 로봇이라는 것과, 로봇 또한 인간처럼 서정성을 갖는 것이 색다르면서 대단히 슬픈 감상에 젖게 한다. 절절한 고독 또한 느껴진다. 마치 다시 못 볼 거대한 노을을 지켜보는 것 같다.

영화를 관통하는 노래가 '아메리칸 파이'다. 20세기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묵시록같은 노래다. '아주 오래전/ 난 여전히 기억한다/ 그 음악이 얼마나 나를 웃게 했는지/ …/ 그러나 2월 난 몸서리 쳤다/ 끔찍한 뉴스들로 도배된 신문을/ 문 앞 계단까지 배달해야 한다니/ 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어' 미국을 상징하는 파이와 이별을 고하며 미국의 허상을 조롱한다. 그 이별의 날을 '음악이 죽은 날'(The day the music died)로 묘사한다.

'핀치'는 '캐스트 어웨이'처럼 톰 행크스 1인극이다. 이제는 연륜까지 묻어나, 말을 하지 않더라도 눈빛만으로도 많은 얘기를 전해준다. 뛰어난 배우임을 이 영화를 통해 실감케 한다. 116분. 전체 관람가.

김중기 문화공간 필름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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