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과거'와 '미래'

박상전 사회부 차장

박상전 사회부 차장
박상전 사회부 차장

7년 전 베트남의 허름한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노인이 한국말을 쓰던 필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쳤다. 소리친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겁에 질려 있던 점은 분명했다.

처음 보는 한국인을 귀신처럼 대한 이유를 나중에 알게 됐다. 그 노인은 60년 전 '소년 베트콩'이었다. 한국의 맹호·청룡부대와 살육전을 벌인 것이다.

실제로 그 마을 입구에는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에 새겨진 문구가 섬뜩했다.

'한국군이 마을 주민을 대량 학살했다. 그냥 죽이지 않았다. 입술을 도려내거나 손가락을 모두 자른 뒤 떠났다. 입술이 없는 사람은 물을 삼키지 못해 말라 죽었고 손가락이 절단된 이들은 밥을 못 먹어 아사했다.'

사정을 파악한 채 풀 죽어 있던 필자에게 베트남 가이드는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 그럴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의 지원금으로 참전했다. 본진에 있는 미군을 외곽에서 경호하며 지원하는 업무는 주로 한국이 맡았다.

베트콩으로선 본진의 미군을 치려면 외곽의 한국군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게릴라 전술의 특성상 야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한국 군인들을 죽이고 본진에 잠입해야 했다.

'밤새 안녕'이란 말처럼 한국 군인은 밤사이에 소리 없이 죽어갔다. 어젯밤만 해도 멀쩡했던 전우가 새벽에 두 동강 난 채 주검이 돼 있는 모습을 본 한국군도 증오에 불탔을 거다. 영화 플래툰처럼 증오와 공포가 교차하면서 양민 학살을 했을 수도 있다.

현재의 베트남은 한국에 매우 우호적이다. 하노이 시민들은 한국말 배우기에 여념이 없고 호찌민에서 가장 가고 싶은 직장은 한국 기업이다. 길에서 베트남 국민과 한국인 여행객 사이에 시비가 붙으면 베트남 경찰은 자국민을 나무라는 일이 다반사다.

양국이 반세기 만에 '절친'이 된 이유로 베트남의 대국적 기질을 꼽는다. 미국, 프랑스, 일본, 몽골 등 패권국을 모두 물리친 베트남이다. 역사적 자부심 덕분에 국민적 자존심도 강한 베트남이지만 유독 한국만은 예외다. '과거를 잊지 말되 미래로 함께 가자'며 포용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과거를 잊지 말자'는 점보다 자신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마음가짐이다. 과거보다 미래를 더 중요하게 내다본 그들은 이제 신흥경제국이 되어 동남아 강국으로 성장했다.

전쟁과 같은 경선을 마친 국민의힘 대선 후보 선출 결과 홍준표 후보는 윤석열 후보에게 석패했다. 즉시 '깨끗한 승복'을 선언했으나 캠프 참여는 뒤로 미뤄 둔 채 사실상의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자리를 맡건 맡지 않건 중요한 점은 '경선 승복'이라는 과거 시점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 어떤 행보를 할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걸린다. 자신을 지지하던 당원·국민을 향해 미래 비전 메시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던져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방선거도 미래에 대한 고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 보인다. 특정인의 3선 도전 성사 여부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코로나19로 피투성이가 된 대구를 어떤 미래로 안내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의식해 권영진 시장은 '포스트 코로나에 준비된 시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경쟁자는 언제든 나올 수 있다. 순식간에 판세가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구의 미래 비전'이라는 이념으로 무장한 채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한 자격은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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