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11월 10일의 단상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11월 10일은 대구경북 사람들에게는 100여 년 전의 일로 특히 남다른 날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1919년 11월 10일 새벽, 중국 길림성에서는 13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의열단(義烈團)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옛 대구은행에서 근무하다 은행 돈 1만500원을 갖고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자금으로 사용한 대구 출신의 이종암 부단장과 서상락, 경북 출신의 권준과 신철휴 4명이 단원으로 참여했다.

이들 의열단원이 뭉치기 2년 전인 1917년 11월 10일, 경북 칠곡에서는 장승원 전 경북도관찰사가 총격을 받았다. 그에게 총을 쏜 주인공은 대구경북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던 박상진·우재룡 등 애국지사들이 만든 비밀조직인 (대한)광복회 회원이었다. 영남 제1의 부호이자 친일 인사로 알려진 인물이 암살됐으니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들 두 해의 11월 10일에 일어난 기념할 만한 행적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는 종전과는 다른 무력을 앞세운 의열 투쟁이 본격 나타나기 시작됐다. 친일파나 일제 관료 등에 대한 무장 투쟁과 폭탄 투척 등이 이어졌고, 대규모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에 따른 젊은이들의 순국과 희생도 커지게 됐다. 하지만 종전의 외교 중심 독립운동이 가진 한계점을 극복하는 계기가 됐다.

공교롭게도 이들 두 날에 관련된 인물에는 대구경북 출신이 여럿 포함됐고, 부산경남 출신까지 보태면 김원봉 의열단장을 비롯해 영남 젊은이들의 활약은 학계 평가처럼 빛이 났다. 물론 그에 따른 광복회 박상진 총사령·김한종 충청도지부장(대구감옥)과 채기중 경상도지부장(서대문감옥) 등의 사형과 순국(1921년) 희생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11월 10일에 얽힌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이를 기리는 행사조차 없는 대구경북의 요즘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최봉태 변호사 등이 소속된 시민단체인 만민공동회 회원들이 홍보에 나서 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들 회원들은 "오늘날 인터넷에는 '장승원이 독립군 군자금 조달에 나섰다'는 이야기까지 버젓이 나돈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여기에는 '청산리 전투 승리는 장승원의 군자금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글도 덧붙어 있다. 인터넷의 역사 왜곡 진화(?)가 그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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