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현진건은 대구의 숨은 진주다

오철환 전 대구시의원

오철환 소설가·전 대구시의원
오철환 소설가·전 대구시의원

빙허 현진건은 대구가 낳은 빼어난 소설가다. 그는 1900년에 대구 계산동 속칭 뽕나무골에서 태어났다. 계산동 일대는 시인 이상화의 고택과 국채보상운동 최초 발의자 서상돈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 지성의 흔적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현진건은 개화기 명문 가문의 후손으로 유서 깊은 동네에서 일찍부터 근대 정신을 접하였고 그의 부친이 설립한 대구노동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동네 친구 이상화, 백기만, 이상백 등과 사귀며 신문학의 싹을 틔웠다. 그렇다고 마냥 대구에 갇혀 있지 않았다. 경성은 물론 중국, 일본 등지로 유학을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제적 감각을 익힐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외면하지 않았다. 동네 문우들과 함께 대구에 기반을 둔 최초의 습작 동인지 '거화'를 발간하였고, '여명' 창간호에 향토문학을 일으키자는 평론을 발표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현진건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그의 집안은 전형적인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큰형 홍건은 러시아 통역관으로 독립군을 도왔고, 셋째 형 정건은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신의주에서 옥사하였다. 재종형 상건도 고종의 밀명을 받아 유럽을 돌며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셋째 형 정건이었다. 그의 성장 배경을 보면 그의 역사관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동아일보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은 돌발적인 행동이 아니고 그런 성장 환경에서 유래한 필연적 의거다.

현진건 문학이 민족애와 향토애에 닿아 있는 것도 그런 연유다. 식민지의 참담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 속에 동포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 짙게 깔려 있다. 대구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고향'은 동포에 대한 연민이 처절한 양상으로 나타나 있다. 현진건은 체험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곧 소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자연주의 작가이자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한 리얼리즘 소설가이다. 그는 사실주의 문학을 완성함으로써 한국 근대소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영혼까지 끌어다 댔다. 내선일체라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에 황국신민화정책을 강행했다. 당연히 문학계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감시와 검열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고, 존경받는 유명 문인을 겁박해 일제를 찬양하고 징병을 고무하는 글을 강요하였다. 희망을 잃거나 심지가 굳지 못한 수많은 문인이 일제의 강압에 무릎을 꿇었다.

그 후유증으로 일제하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인 중에 친일과 무관한 사람은 손꼽을 정도로 귀하다. 기억할 만한 문인이 친일 논란 없이 존재한다면 그만큼 희소가치가 큰 셈이다. 현진건은 친일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문인이고 문학성도 높이 평가되는 소설가다. 민족정신이 투철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징성이나 문학성도 함께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현진건은 가히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하다.

게다가 대구와의 친연성을 감안하면 현진건은 대구가 발 벗고 나서서 우선적으로 현창해야 할 보석 같은 위인이다. 현진건문학상이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은 많다. 계산동 인근에 '현진건 거리'를 조성해 근대골목과 연계하고, 현진건을 기리는 문학관을 지어 가칭 '운수 좋은 집'으로 이름 붙인다면 대구를 찾는 사람들에게 꼭 가봐야 할 명소로 회자될 것이다. 현진건은 대구의 숨은 진주다.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