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한종유(1737-?), ‘강세황 선면(扇面) 69세 상’

미술사 연구자

1781년(45세), 종이에 담채, 22.4×55.6㎝, 강홍선 소장
1781년(45세), 종이에 담채, 22.4×55.6㎝, 강홍선 소장

부채에 초상화를 그린 희귀한 예이다. 화면 오른쪽에 '표암(豹菴) 강공(姜公) 육십구세(六十九歲) 소상(小像)'으로 써놓아 표암 강세황(1713-1791)의 69세 때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노송을 배경으로 한 야외 초상화이다. 평상복 차림의 강세황은 동그란 짚방석 위에 편하게 앉아 땅 위로 드러난 소나무 뿌리에 팔꿈치를 기댔는데 손에는 책을 들고 있다. 소나무 왼쪽에 이 그림을 설명해 놓았다.

신축(辛丑) 구월십일일(九月十一日) 여이(余以) 어용도사감동관(御容圖寫監董官) 부(赴) 규장각(奎章閣) 사(使) 화사한종유(畵師韓宗裕) 도(圖) 여소진(余小眞) 어편면상(於便面上) 파득방불(頗得髣髴) 귀여(歸與) 서손(庶孫) 이대(彛大)

신축년(1781년) 9월 11일, 내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 규장각에 나가 화사(畵師) 한종유에게 나의 작은 초상을 부채에 그리게 했는데 제법 비슷하다. 돌아와 서(庶) 손자 이대에게 준다.

안목 높은 강세황이 "제법 비슷하다"라고 한 것을 보면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1781년은 정조 5년으로 9월에 정조의 30세 어진을 제작하는 일이 있었다. 정조의 첫 번째 어진이었다. 강세황은 당시 호조참판을 제수 받았는데 정조는 강세황을 불러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숙종 때 문신 김진규의 예를 들어 이 어진도사에서 강세황이 직접 붓을 잡고 그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강세황은 늙어서 눈이 잘 보이지 않으므로 지존의 얼굴을 그리다가 잘못될까 두렵다는 이유를 들며 사양했다. 대신 옆에서 부족한 것을 돕겠다고 자청하자 정조는 화원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지휘하라고 허락했다. 이 때 한종유와 장시흥이 어용(御容)을 그린 주관화사였고 김홍도, 김후신, 신한평, 허감, 김응환 등이 동참화사였다. 한종유가 강세황의 이 부채 초상화를 그린 것은 이렇게 만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초상화는 보통의 그림과 달라서 주문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그림이고, 화가가 모델을 직접 관찰해야 하는 그림이다. 강세황이 부채를 가지고 가서 자신을 그려달라고 했기에 가능했다. 강세황 이전에는 초상을 부채에 그린다거나, 이렇게 자연스런 평소 모습을 초상화로 남긴다거나 하는 일이 드물었다.

제례용의 정식 초상화와 다른 이런 유형을 소상(小像), 소진(小眞), 소조(小照) 등으로 불렀다. 후손의 기억과 추모를 위한 조상의 얼굴로서의 초상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존재로서의 자의식과 자기표현 욕구라는 새로운 정서를 대변하는 초상화이다.

강세황은 자화상을 포함해 모두 12점이 전하고 있는 초상화 부자답게 부채 초상화까지 남겼다. 그래서 지금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이 얼굴이 친숙하다. 조상의 초상이 그려진 부채여서 후손들에 의해 원래의 상태대로 고스란히 보존돼 18세기 실물 부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드문 예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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