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뽀글머리의 탄생

이수민 소설가
이수민 소설가

동네 미용실에서 할머니들이 나온다. 이목구비와 몸매는 달라도 머리 모양은 한결같다. 단발에 뽀글머리. 브로콜리 송이를 노쇠한 몸에 얹고 그녀들은 만족스러운 걸음을 옮긴다. 파마 약 냄새가 걸음의 흔적을 대신한다.

단발령 이래 한국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헤어스타일의 변화는 '아줌마 파마'로 일컫는 뽀글머리의 출현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갑자기 도시는 물론이고 시골 여성들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단발에 꼬불거리는 웨이브를 얹고 나타났으니.

단발령에 비하면 뽀글머리는 별 저항없이 여성들 사이로 퍼져나간 듯하다. 심지어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당대 여성들의 변치 않는 지지를 받고 있다. 그녀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쪽진머리에 길든 시선의 반발을 무마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외국인 친구는 뽀글머리가 흑인의 '아프로 헤어'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흑인 특유의 곱슬머리를 살려 자연스럽게 연출한 스타일이 '아프로 헤어'다. 이런저런 대상에 모양을 빗대 보긴 했어도 다른 인종의 머리카락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흑인을 보고 모방한 스타일이 아니겠냐고 친구는 추측했지만, 선뜻 동의하긴 어려웠다. '옛날 사람들, 백인은 몰라도 흑인은 싫어하는데.'

뽀글머리의 기원을 찾고 싶은 욕망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미용실에서 주워들은 말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자료를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급진적인 스타일은 할머니들의 말처럼 단순히 "편해서" 대중화되진 않은 듯했다. 한국전 이후 가발 산업 육성과의 연관성이 보였다.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여성에게 파마 서비스를 공짜로 제공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두발과 복장 단속이 심한 시대에도 여성의 파마만큼은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정보도 찾았다. 도시로 몰려드는 산업 일꾼을 위해 지은 획일적인 아파트처럼 뽀글머리의 탄생은 산업화의 역사와 닿아 있었다.

미용사는 할머니들이 탱글탱글 구슬처럼 말린 컬을 선호한다고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녀들은 원에 가까운 극단적인 컬을 원했을까. 어쩌면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처럼 우아하고 느슨한 컬을 선호하진 않았을까. "일단 말면 몇 달이고 안 풀리니까"라는 미용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산업화시대 최고의 가치인 효율만큼 선택에 영향을 끼친 요소는 없었을 것이다. 파마를 말고 온 어머니는 아이에게도 헐렁한 교복을 지어 입혔겠지.

칼럼을 쓰는 사이 포털사이트에서도 뽀글머리의 기원을 묻는 글 몇 조각을 발견했다. 질문자들은 젊은 세대에 속했다. 구한말 상투를 자른 사건부터 뽀글머리 파마의 유행까지, 후기산업화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식민지와 산업화시대를 겪은 분들의 머리 모양은 일상의 영역이 아니라 이미 검색의 영역이 된 듯했다.

할머니들의 뽀글머리를 생활사박물관 귀퉁이에서 보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 왠지 거대 담론보다 소시민의 머리에 얹힌 역사에 나는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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