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장] 내가 가장 많이 울면서 읽은 책

김용락 전 한국국제문화교류연구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김용락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 원장·시인

나는 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으로 오래 먹고살았기 때문에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이 많은 편이다. 어릴 때는 가난한 시골에서 농부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집에 책이 거의 없었다. 부친이 초등학교 교사인 옆집 친구 집 안방과 마루에 있던 문학과 사상 전집류 장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릴 적 그런 경험이 그 나름 '트라우마'가 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중학생 때부터 용돈을 아껴 값싼 삼중당 문고판을 사고 대학 때는 배고픔을 참으며 점심을 굶고 대신 돈을 아껴 책을 사 모았다.

어릴 적 시골 강변의 자갈밭에 광목 포장으로 설치한 가설극장에서 가끔 영화를 보고 중학생 이후부터는 '문화교실'(1960, 70년대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할인된 자부담으로 거의 강제적인 영화 단체관람을 시켰는데 그걸 부르는 명칭이다)에는 참석했지만, 자발적인 영화 관람은 거의 하지 않았다. 영화는 한 번 보는 것으로 돈(입장료)이 사라지지만, 책은 사서 읽고 오랫동안 남으니 그게 훨씬 이익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책을 머리맡에 두고 밤에 자다가도 눈떠서 보면 윗목에 책들이 수북 쌓여있는 게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말했다는 '무릎이 썩는 독서'를 책상머리에 붙여두고, 성인이 되어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말한 '과골삼천'(踝骨三穿·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날 정도로 앉아서 책을 읽었다는 뜻)을 알게 되어 늘 마음속에 새기고 다녔다. 물론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무릎이 썩지도 않았고 복사뼈에 구멍이 한 번도 나지 않았다. 젊어서 다짐만 그랬지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가끔씩 사람들이 나에게 지금껏 읽은 책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세계문학대전집, 한국문학전집, 세계사상대전집, 단행본 등 망망대해와 같은 책의 세상이 출렁거리며 눈앞을 지나간다. 책에서 받은 말할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이 온몸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럼에도 지금껏 내가 읽은 책의 권수와 아는 지식이라고는 저 갠지스 강의 모래 한 알보다 더 작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 숱한 책 가운데서 감동받은 책이 없을 순 없다. 내가 읽으면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책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돌베개·1983)이다.

한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GNP)이 1960년 90달러, 1970년 1천100달러, 1980년 5천528달러, 1983년 1만1천432달러 등으로 1983년에 비로소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 지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세대는 참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다. 굶기 일쑤였고 이를 악물면서 그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지난 13일은 전태일이 분신한 지 51주기가 된 날이었다. 그는 1948년 대구시 남산동 184번지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우리도 인간 대접을 해달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지난해 50주기를 맞아 그가 어릴 때 살았던 남산동 집을 대구 시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매입해 보존하기로 하고,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를 했다.

그의 이름은 이 땅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의 가치를 준거하는 단어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노동이 통하지 않은 부의 축적, 투기와 같은 물신주의가 괴물처럼 우리를 삼키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뜨겁고 무거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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