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의기(義妓), 논개 뒤이어 나라 위해 싸우다

'붉은 마음의 여걸'

1919년 3월 만세 시위에는 기생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도 나섰다.
1919년 3월 만세 시위에는 기생 뿐만 아니라 부녀자들도 나섰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소앙(대한민국장)은 애국지사 82명의 이야기를 다룬 『유방집』을 남겼다. 그는 당초 1933년 펴낸 책에 없던 경북 출신 여성 독립투사 남자현(대통령장) 사연을 이듬해 별도의 글로 쓰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옛날…왜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들어와 도적질을 할 때에 여걸들이 나와 역사를 밝게 비추었으니…계월향은 연광정에서…적장을 죽였고, 논개는 촉석루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물로 뛰어들었다.…시대가 흘러 경술년(1910) 나라가 패망한 뒤로…계월향, 논개와 같은 인물을 다시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였는데 근래에 한 명의 여협(女俠)을 얻게 되었다.…혁명의 어머니라 칭송하였고…근대의 여협 남자현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러나 조소앙의 한(恨)과 달리, 임진왜란 때 못지 않게 독립운동을 위해 의(義)로운 죽음을 맞은 붉은 마음(丹心)의 여걸은 많았다. 계월향과 논개의 정신을 이어받은 기생 즉 의기는 여럿이었고,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행동은 사대부 양반을 앞섰다.

국채보상운동 나선 염농산
국채보상운동 나선 염농산

◆염농산 등 국채보상으로 항일 물꼬

조선 기생은 1894년 갑오개혁의 신분제 철폐 이후 1897~1908년에 걸쳐 관기제도가 없어져 사라졌지만 실제는 기생조합과 권번을 통해 존속됐다. 조선시대처럼 일제강점기 때도 그랬고 여전히 천한 신분이었다.

그러나 기생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 빛난 행동에 나섰고, 뒷날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구 기생 앵무(염농산)는 나랏빚을 갚으려 남자들이 금연하며 모금하자 100원을 내놓았다. 당시 여성 참여자 평균 의연금이 50전 밑이었으니 큰 돈이었다. 게다가 그는 "누구든지 남자가 1,000원, 10,000원을 출연하면 저도 죽기를 작정하고 따라 가겠다"고도 했다.

그는 이어 경북 성주 용암의 들이 홍수 피해를 입자 둑 쌓는 일도 했다. 주민들은 이에 '앵무빗돌'로 불린 '염농산제언공덕비'를 1919년(1937년)에 세웠고, 비에는 '돌을 쇠뇌로 힘겹게 옮기어/개울의 동쪽에 쌓았네/…/나라에서 계획한 것을 민간에서 행하니/…/하여금 어찌 가히 잊을 수 있으랴'라는 글을 새겼다.

국채보상은 전국 기녀들도 나서 경남 진주에서는 노기 부용의 발기로 조직된 진주애국부인회가 기생 등의 협조로 498원 15전을 모았다. 이는 전국 여성 의연자 가운데 최고액이었고, 회원 1인당 평균 의연금도 2원 56전으로 최고였다. 경남 의령군의 퇴기 20명회(會)도 16원 30전을 냈다. 당시 여성 국채보상운동 참여 단체 47곳 중 기생(관련) 단체는 8곳이었다.

◆피로 그린 태극기 흔들며 만세운동

1919년 3·1만세운동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을 컸다. 2천만 백성이 만세를 외칠 때 기생의 참여도 빠지지 않았다. 다만 기록과 발굴 사례가 많지 않아 국가 공훈록에는 기생 출신 서훈자가 11명쯤 확인될 뿐이라 안타깝다.

황해도 해주에서는 직접 한글로 독립선언서를 지어 5,000장을 찍고 태극기도 손수 제작해 그해 4월 1일 만세시위를 벌인 기녀들이 돋보인다. 바로 김성일(김월희·대통령표창)을 비롯, 김해중월(김용성·〃)·김화용(〃)·문응순(문월선·건국포장)·문재민(문향희·애족장)·송금희(대통령표창)·옥운경(채주·〃)·이벽도(〃) 등 8명이다.

문재민은 동료 기생들과 함께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김용성과 문응순 등 5명은 경찰서 앞에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저항해 4~6개월 옥살이를 했다. 경기도 수원에서는 김향화(김순이·대통령표창)가 그해 3월 29일 동료 기생 30여 명과 시위하여 징역 6개월로 투옥됐다 가출옥했다.

경남 통영군에서는 같은 해 4월 2일 통영면의 한 기생조합소에서 이소선(이국희·대통령표창)과 정막래(〃)가 다른 기생 4명과 함께 기생단을 꾸려 금반지를 팔아 마련한 장례용 옷을 갈아입고 군중들에 섞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마산감옥에서 투옥됐다 그해 10월 18일 출옥했다.

통영에서는 1927년 5월에도 기생 투쟁이 있었다. 친일파인 경남도평의회 김기정 의원(변호사) 규탄시위에 나선 강명순(대통령표창)·주선이(주순이·〃)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한국인은 교육이 불필요하며 한국어 통역은 철폐돼야 한다"는 김기정을 규탄한 한국인 10여 명을 경찰이 체포하자 이에 항의한 군중 시위에 참여했다 투옥됐다.

현정건 도운 현계옥
현정건 도운 현계옥

◆광복회 지원·무기 수송 등 활약도

서훈받지 못한 기생의 저항과 지원 활동도 많았다. 먼저 대구에서 1915년 결성된 비밀 단체인 (대한)광복회의 유일 여성 회원인 기생 어재하가 있다. 서울 인사동 그의 집은 광복회 비밀 장소였고, 김좌진 만주지부장 송별회도 열렸다. 박상진 총사령 등 광복회 간부들이 모인 송별회에서 어재하는 김 지부장에게 여비를 챙겨줄 만큼 열성이었다. 광복회를 조력한 전북 군산 기생 강국향과 서울 기생 오송월도 있다.

대구 출신 기생 현계옥은 독립운동가인 현정건(독립장)을 따라 중국에 망명, 의열단 유일 여성 단원으로 무기수송 활동 등을 펼쳤고, 영화 '밀정'으로 널리 알려졌다. 현계옥은 기녀인 두 동생 계향·월향에게도 독립운동가 박일병(애국장)과 신백우(애족장)를 돕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 출신 기생 정칠성은 3·1만세운동 이후 여성 해방운동 등으로 '사상기생'의 길을 걸었다. 또다른 대구 기생 김연수는 대구 독립운동가 최윤동(애국장)의 1921년 중국 망명에 동행해 그를 도와 북경에서 국권회복활동에 나선 행적이 일제 경찰 비밀자료집인 『고등경찰요사』에 소개됐다. 1901년생인 김연수는 1920년 경남 의령에서 발생한 일본순사 가이 살해사건이 1923년 발각돼 29명 연루자 신분이 드러날 때(제2 경북중대사건) 유일한 여성 연루자로 고초를 겪었고 1942년 숨졌다.

단발로 잘 알려진 강향란
단발로 잘 알려진 강향란
박열 편지 전한 이소홍
박열 편지 전한 이소홍

대구 출신 강향란과 경북 칠곡 출신 이소홍 두 기생도 눈에 띈다. 강향란은 실연을 딛고 머리를 자르고 배움에 나선 첫 단발 여성으로 언론에 보도될 정도였는데 3월 만세운동 이후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뒷날 근우회 참여 등 활동을 했다. 강향란은 1923년 중국 상해로 가기 전 서울에서 독립지사들과 인연을 맺고 일본의 박열(대통령장)의 일왕폭살 의거를 돕는 연락 일을 맡았다. 강향란이 떠나고 뒷날 이 역할을 이은 이소홍은 박열과 국내 독립운동가인 김한(독립장) 사이 오가는 편지를 전달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손병희 부인 주산월
손병희 부인 주산월

한편 1894년 태어나 기생으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대한민국장)의 부인이 된 주산월(주옥경)은 서대문감옥에 갇힌 남편 옥바라지와 1920년 10월 병보석 출옥한 남편 간병에 헌신했다. 손병희가 1922년 5월 별세한 뒤에도 계몽운동 등으로 1982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존경받는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강향란 사연 전한 동아일보
강향란 사연 전한 동아일보

이소홍 구금 전한 동아일보
이소홍 구금 전한 동아일보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