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작품은 작가보다 말이 많다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적확한 어휘를 구사하는 산문을 읽다가 나는 가끔 좌절할 때가 있다. 글 한 꼭지 쓰는 게 개인전 세리머니하는 것처럼 부담스럽고 어렵다. 그림을 그리거나 몸으로 작업하는 사람들 대부분 그런가 생각해 보지만, 이건 지극히 나를 잠시 위무하는 말밖에 안 된다. 개인전이 있으면 작업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 '에잇 이런 말을 이렇게 할 걸 그랬나…'라고 끝나면 아쉽다.

"자 그럼, 이제 작품설명 좀 부탁합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중요한 질문이니 시시콜콜 따질 일은 아니지만, '그닥 신통치 않은 작품인데요…'라며 멀뚱히 넘어가기 민망해서 "보도자료 참고하시면 안 될까요…"라고 재차 설명을 대신하는 경우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으로는 작가와 기자의 소통이 충분치 않다.

자신의 작품을 두고 "음… 제 작품은 말입니다"로 시작해서 화사한 색 쓰듯 고상하게 포장하고, 근사한 회화적 장치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면서 고매하게 표현하는 일은 아티스트라면 무엇보다 당연하다. 더더욱 관람자를 배려하는 일인데, 친절한 교감이야말로 정말 의미있는 배려 아닐까.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일, 이를테면 조형의 얼개를 쉽고 정확히 말해야 할 때도 좀체 내 언어의 자의식이 수월하게 촉발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건 순전히 사적인 생각이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작품은 늘 작가보다 더 많은 서사를 반영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에 드러난 작가의 균열만 보더라도 특별하게 읽어낼 수 있는 게 회화다. 작품은 사색의 찌꺼기고, 생각의 증폭이며, 작가의 온전한 거울이다. 그리하여 '야릇한 고독과 슬픔을 은폐한 결과물'이라면 특히 좋은 작품이 될 확률이 높다. 가령 거두절미해도 가타부타하지 않아도, 회화는 말보다 격하거나 고요한 파장으로 옮겨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전시장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며 살핀다. 첫째는 작가세계의 사유를 계측하는 일이다. 그림을 보면 다분히 읽힌다는 점과, 나아가 작품에는 작가에 대한 철학이 정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게 그것이다. 둘째는 작품을 감상할 때 텍스트는 등한시하거나 아예 보지 않는 버릇이다.

이미지를 습득하고 궁금하면 그때 리플렛을 펼쳐도 늦지 않다. 나의 생각과 작가는 어떤 괴리가 있는지 따져본다. 정말이지 이게 나의 오래된 관람 태도다. 이런 이유를 나는 충실히 믿으면서 작품을 감상한다. 반대로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읽지 못한 그 무엇의 세계가 작품에 있었다면, 그래서 공감하지 못했다면, 아직 나에게는 먼 길이 남았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겠다.

'작품 좋다', '개성 있다'고 말하는 차이의 간극에 작가의 삶이 개입하면 매우 복잡해지고 주관적이 되는 게 오늘의 미술이다. 사회가 복잡해져서 미술도 난해해졌다는 논리에 공감한다. 자연스럽다. 그래서 돌출하는 문제들이 그림이고, 창조적 변칙이며, 활력을 주는 이미지들의 변종이니까. 아무튼 나의 작품을 두고 어쩌고저쩌고하는 일은 다소 고된 일이지만, 예술이 없으면 안된다고 믿는 그 마음은 정말 고상한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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