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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읽는스포츠] 대구FC 창단 막후 실세는 고 전두환 대통령

스포츠 좋아하고 정치 이용한 대통령으로 기억…재임 기간 프로야구·축구 출범, 86아시안게임 개최·88올림픽 유치

지난 23일 세상을 등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포츠를 좋아하고 정치에 이용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6년 6월 대구공고 동문 가족 골프대회에 참석한 전 전 대통령 모습. 매일신문 DB
지난 23일 세상을 등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포츠를 좋아하고 정치에 이용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6년 6월 대구공고 동문 가족 골프대회에 참석한 전 전 대통령 모습. 매일신문 DB
김교성 디지털 논설위원
김교성 디지털 논설위원

지난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포츠를 좋아하고 스포츠의 힘을 잘 이용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정치 행위에 대한 평가를 미루고 스포츠 측면에서 고인은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앞장섰다. 국내 최고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모두 전두환 정부 시절 출범했으며 대한민국을 세계에 각인한 1986년 아시안게임 개최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도 그의 재임 기간에 이뤄졌다.

대구공고 출신인 고인은 대구 스포츠 발전에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고교 때 축구부에 몸담는 등 남달리 축구를 좋아한 그는 모교 축구부 후원에 힘을 쏟았다. 대구공고 축구부 감독은 대통령 퇴임 후 동문 체육대회 등으로 학교를 찾은 그에게 절을 하고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했다. 그는 지난 2016년까지도 동문 가족 골프대회에 참가하는 등 스포츠를 즐겼다.

기자는 2002년 대구FC 창단 과정을 지켜보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영향력에 꽤 놀란 적이 있다. 김대중 정부 때인 당시 그는 정치적으로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였음에도 대구FC 창단 과정에 입김을 발휘했다.

대구FC는 한·일 월드컵으로 활활 타오른 축구 붐을 등에 업고 2002년 국내 첫 시민구단으로 창단했다. 그해 6월 제13대 대구시장 선거에서 당선된 조해녕 시장과 대구상공회의소(회장 노희찬)가 창단을 주도했다. 초대 사령탑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인공인 박종환 감독이었다.

조 시장과 노 회장, 박 감독 등 3명은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조 시장은 제5공화국 초기인 1981년 12월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했는데 전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회장은 대구공고 출신으로 전 전 대통령의 후배였다. 그는 대구공고 총동문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전 전 대통령과도 친분을 나누는 사이였다. 노 회장은 대구FC의 초대 대표이사를 맡았다. 박 감독은 멕시코 4강 신화 달성으로 청와대 초청을 받으면서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박 감독은 "청와대에 들어갈 때 검문을 받지 않았고 매번 돈 봉투를 받았다"고 전했다.

박 감독은 그해 10월 창단 초대 감독으로 이사회를 통해 선임됐는데, 이사회가 열리는 날 그의 인터뷰 기사가 매일신문에 단독 보도됐다. 이날 이사회는 박 감독 선임을 연기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등 난황을 보였는데, 그의 선임이 미뤄졌다면 이 기사는 오보로 남을 뻔했다.

지난 2002년 창단한 대구FC의 초대 사령탑은 지난 23일 고인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박종환 감독이 맡았다. 사진은 대구FC 초대 사령탑인 박종환 감독의 사인 공.
지난 2002년 창단한 대구FC의 초대 사령탑은 지난 23일 고인이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박종환 감독이 맡았다. 사진은 대구FC 초대 사령탑인 박종환 감독의 사인 공.

당시 박 감독은 인터뷰에서 전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한 달에 한두 차례씩 찾아뵙는다. 얼마 전 나이를 묻더니 '한 번 더 해보지'라고 말해 어리둥절해 한 적이 있다. 대구 축구단의 감독 제의가 들어올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요즘 대구FC는 잘 나가는 축구단이지만, 초창기에는 안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역 경제인 등 시민이 돈을 내 만든 시민구단이란 거창한 명분과는 달리 자금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대구시가 무작정 돈을 쏟아부을 수 없는 법적 구조였기에 K리그에서 중하위권 성적을 내며 기업구단의 들러리 역할에 머물렀다.

대구FC 창단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조 시장이 나서면서 대구 지역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은 틀림없지만, 창단을 지시한 총감독 역할은 전 전 대통령이 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2002년에도 이런 의혹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시민구단의 정체성 논란이 제기됐다.

고인은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스포츠를 좋아한 이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에 프로 스포츠를 자리 잡게 했으며 스포츠 민족주의를 앞세운 엘리트 체육의 부흥도 이끌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 후 야구, 축구, 씨름이 프로화했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우민화 정책으로 프로화를 추진했다는 비난도 있지만, 국내 스포츠는 이를 계기로 크게 발전했다.

지역 연고제를 채택한 프로야구는 고교 야구 열기를 발판삼아 처음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전 전 대통령은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시구했다.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검정 구두를 신고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 1983년 5월 8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할렐루야와 유공의 프로축구 개막전 시축자도 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1983년 전통 스포츠인 씨름의 프로화도 끌어냈다.

고인은 1982년에는 체육부를 신설, 체육인들의 위상을 높였다. 초대 체육부 장관은 최측근인 고 노태우 대통령이었다. 체육부를 통해 1986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88년 올림픽을 유치했다. 또 엘리트 스포츠 산실인 태릉선수촌을 자주 찾아 국가대표 선수들을 격려하는 한편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축전을 보내고 청와대에 초청하는 등 체육인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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