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들이 긴 천을 늘어뜨리며 무대 위를 누빈다. 무대 가운데로 모여들어 '산' 형태를 만들었다가 일순간 와르르 무너진다. 곧 다시 일어나서 각자의 흥에 맞춰 '막춤'을 춘다. 1981년 5월 21일 대구시립예술단 창단 공연(대구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선보인 대구시립무용단의 작품 <산>의 일부 장면이다.
비록 오래된 영상이지만, 춤 동작만으로는 요즘 무대에 그대로 올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최초 국공립현대무용단으로 출발한 대구시립무용단의 창단 공연답게 '현대적'이다. 1980년대 관객들은 저런 형태의 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렇듯 지금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은 김기전(1935~) 초대 안무자가 남긴 영상 덕분이다.
이 영상은 현재까지 수집한 공연 기록 영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근대기 이후 예술가들이 남긴 자료들을 샅샅이 살피고 있지만, 지역 방송국이 방송용으로 촬영·소장하고 있는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는 종이 기록물이나 사진, 릴 테이프, 녹음테이프 등이 우리가 찾은 자료의 대부분이다. 우리 지역 예술가들은 1970~80년대에 이르러 조금씩 공연을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김기전 선생님께 영상 제작 당시의 환경을 여쭤보았다. "내가 비디오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어요. 영상 촬영을 위한 리허설을 별도로 했어요. 1970년대부터 대구MBC와 '목요발레'라는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했기 때문에 방송국 PD들과 친분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증언 덕분에 그 영상이 공연 실황이 아니라, 리허설 영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구시립무용단은 1981년 창단 공연을 포함해 꽤 많은 영상들이 남아있다. 김기전 선생님의 주요 작품을 비롯해, 제2대 안무자 구본숙(1946~) 선생님의 작품 대부분이 영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분은 개인 발표 무대도 다 영상으로 보관하고 있다.
1980년대 대구시립무용단 정기 공연에서 달성공원에 설치된 조형작품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이 춤을 춘 것, 팔공산 자락 동구 백안동에서 추수가 끝난 가을 들녘을 배경으로 무용수들이 마을 주민들과 어우러지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지금 봐도 놀랍다.
2대 안무자 구본숙 선생님의 작품영상은 공연마다 리허설, 본공연, 리셉션으로 나눠 정리되어 있다. 리허설 영상으로는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고, 리셉션 영상을 통해 당대 예술인들의 교류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대구시립무용단 30회 공연 <와서 흙과 몸을 섞으라>(1996.11.1.)는 몇 번이나 되돌려 봤다. '밀양 백중놀이'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든 이 작품은 한국적인 무대 장치와 안무가 돋보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무형문화재 날뫼북춤 예능보유자 김수배 선생님이 특별 출연해서 자신의 또 다른 장기인 구음(口音)과 함께 들썩들썩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반갑다.

그 자체로 예술품으로 남겨지는 문학이나 미술작품과 달리, 공연은 예술가들의 행위를 동 시간대에 관객들이 관람하는 시간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그 시간을 기록해왔다. 영상과 팸플릿, 그리고 관련 기사자료들을 함께 살펴보면 당대 예술인들이 공연을 통해서 담아내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무용과는 달리, 음향이 중요한 연주회는 영상으로는 실연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다. 방송국 녹화 장비의 도움을 받은 경우, 그나마 양질의 기록 영상을 찾아볼 수 있지만, 대부분 무대 세트와 의상, 당시 출연자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다. 1980년대 대구시립교향악단의 공연영상 가운데, 좋은 화질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1982년 12월 대구시립교향악단 송년대음악회(대구시민회관 대강당) 영상이다.
정보통신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공연을 정해진 시간에 공연장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조금씩 해체되고 있기는 하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가 공연을 대신 관람하는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공연은 현장감이 생명이다.
기록 영상은 우리가 과거 예술인들의 시간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도와주는 훌륭한 장치다. 대구예술발전소 3층 열린 수장고를 찾으면 과거 예술인들이 남긴 1980~90년대 공연 영상들이 상영되고 있다. 무용단, 교향악단, 오페라단, 극단들의 1980년~90년대 영상들과 함께 40년 전, 예술인들의 무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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