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일오처는 고요하다. 틀어진 고요를 잠시라도 펴고 싶다. 오디오의 전원을 넣었다. 클래식은 바닥에 깔려 우울하고 소리의 해상력은 탁하다. 작업실의 좁은 창을 따라 바깥 풍경을 보았다. 하늘이 맑다. 심약해진 심장은 마음 둘 곳이 없고 수점의 교차로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다. 세상은 순식간에 의심스럽고 적막해졌다.
오직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작업실 밖의 온화한 풍경 뿐이다. 그곳에는 빈 공기들과 살랑대는 나무들과 빈 그림자들이 거친 우려들을 쏟아낸다. 어디서 창궐하는 무거운 고요가 엄습하고, 도래하지 않을 것 같던 암울한 유령들이 급히 출몰했다. 사람들은 코와 입을 틀어막고 현란한 세상을 호명했지만, 그들은 다만 단절하기를 호소했다. 누군가는 곧 세상의 풍경이 달라질 거라고도 했다."
작년 2월 20일에 쓴 작업노트다. 코로나19가 대구에서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하던 날이다. 모든 뉴스는 대구의 신천지로 집약됐고, 사람들의 동선은 집으로 제한되던 때였다. "대체 뭐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덮친 공포였다. 불안한 사람들이 멍한 눈빛으로 봄을 기다릴 때,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나 자신이 아닌 무시무시한 바이러스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만난 눈은 염려와 우려가 교차하다 곧 다시 작업으로 돌아왔다.
지난 수년간 거짓말 같은 불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작업했다. 부지불식간에 달아오르는 몸의 변화와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혼란들을 개선시킬 요량으로, 몸 쓰는 큰 작업으로 대신해 봤지만, 완화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예컨대 그 어떤 곳을 향해 벌겋게 날을 세워 통곡하다 호흡이 턱턱 걸리면 또 누군가에게 속사포처럼 내질러대는 식이었다. 이런 변화의 기미를 주변에서는 갱년기라고 했다.
그때 나는 대구예술발전소의 입주작가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작품을 할 기대로 잔뜩 설레던 시작점이었다. 젊은 작가들과 더불어 현기증 나는 시대의 속도감을 즐겨야지 하는 생각으로 레지던시에 동승했다. 과도한 변화까지 흡수해 한 발 진화된 작품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절없이 심장의 각혈만 꺼억꺼억 하던 한 달이 지나자 거대한 바이러스와 마주했던 것이다.
봄이 땅속에서 숨을 고르며 초록이 고개들 때를 기다리던 시기에 도시는 갑자기 공허해졌다. 나는 무엇을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 삶이 떠있는 풍경의 한 장면을, 지금 파란 이 하늘을, 하얗게 내리는 햇살의 밀도를 그림으로 옮기고 '사랑 후에 남겨진 무게'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마스크가 입을 봉쇄한 일상이 된 지도 2년이 되어간다. 지금 나의 사적 갱년기도 코로나의 불편함도 곧 극복되리라 믿는다. 고통이 깊게 간여한 작품이 아름다운 것처럼 인간의 지혜는 늘 놀라웠으니, 이 지속되는 코로나를 보고 영영 실망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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