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멋대로 그림읽기] 김광배 작 '세월' 162.2x97cm, Oil on Canvas, 2009년

흔히 대나무와 소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세찬 바람과 차가운 눈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습은 세파에 이끌리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마음가짐을 표상한다.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들어짐을 안다'는 뜻으로, 확장하면 사람도 어려움이 닥쳐야 비로소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안다는 의미로 지사(志士)의 뜻과 기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오롯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변화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차라리 질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회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오늘날 회화는 서구 전통회화에서 주로 사용하던 유화보다 소재나 재료, 마티에르에 있어 훨씬 다양해졌다. 그럼에도 유화는 재료의 성질상 기름지고 두툼한 물성이 풍부해 2차원적인 평면에 3차원적인 부피감을 표현하는데 유용한 장점을 갖고 있다.

김광배 작 '세월'도 전통 유화작품이다.

굵고 휘어진 줄기가 위로 뻗쳤고 옆 가지의 푸른 솔잎은 갖은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견뎌낸 인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특히 줄기에 묘사된 거북등을 닮은 껍질은 우리네 할머니들의 늙은 손등처럼 익숙하다.

세월에 장사가 없다지만 언제나 손주의 손을 따뜻이 감싸주던 할머니의 손은 온갖 세월의 멍에를 이겨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변함없는 '내리사랑'의 전형(典型)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어느 산을 등산하더라도 만나봄직한 이 작품 속 소나무 또한 그러하다. 익숙하다 못해 덤덤한, 그러나 팍팍한 삶을 되돌아볼 때 힘이 되어주는 그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말이다.

김광배는 아마도 이런 소나무에서 작가적 감수성이 발동해 몇 년 전부터 대구 인근 앞산, 비슬산, 팔공산을 드나들며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화면 속 소나무와 그 색감은 인상파 그림처럼 빛의 산란에 의한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품속에 감춰진 세월의 시간성과 생명의 정취를 담고 있다. 이는 작가가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자연이 주는 감흥을 캔버스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절벽 끝에 간신히 매달린 소나무, 비탈길에 용케도 자리잡은 소나무, 바위틈을 비집고 나와 옆으로 자란 소나무, 밑둥만 달랑 있는 소나무, 하늘도 가릴 만큼 솔잎이 빽빽이 숲을 이룬 소나무 등등. 그야말로 질긴 생명력을 자랑할 뿐 아니라 모진 환경 속에서 견뎌온 끈기와 인내, 그러면서도 도도하게 빛을 발하는 이들 소나무의 푸른 기상에 반하지 않을 화가가 어디 있으랴.

화면에 물감을 올리고 그것을 지우고 문지르고 닦은 후 다시 물감을 올리는 등 캔버스 표면에 새 생명을 심듯 물감을 올리는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김광배는 쉽고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편리를 마다하고 오랜 시간 작업을 통해 질펀한 기름 맛을 지닌 유화를 고집하고 있다. 그의 소나무가 볼수록 뚝배기 안 된장찌개 같은 구수한 맛과 친숙함을 뿜어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로 화업 50년. 흙과 같이 두툼하며, 소박하면서도 거친 숨을 내쉬는 황소의 기질을 닮은 김광배의 작품은 산중 소나무 풍경을 통해 허기진 배에 보리밥 한덩이를 입에 넣어 목으로 삼키는 만족감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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