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는 1910년 8월 15일에 천도교가 발행한 잡지로서, 항일천도교 '기관지'로서 성격이 두드러진 잡지다. 이 무렵은 이미 일제의 실질적인 식민지배가 행해지던 때라, '종교 기관 잡지'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항일 활동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간호는 '융희'라는 연호를 썼지만, 제2호는 '명치' 43년으로 발행연도가 표기돼 있다. 창간 일주일 후인 8월 22일에 바로 한일병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천도교회월보사'는 한일병탄이 이루어지자, 주간 이교홍 명의로 이를 항의하는 성명서를 작성해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에 발각돼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부득이하게 발행인이 교체되는 사태를 맞기도 한다. 출발부터 수난의 역정을 내재하고 있었기에 일제에 의해 폐간되기까지 28년간 가혹한 탄압을 면할 수 없었다. 이처럼 '천도교회월보'는 창간 이후 모진 탄압에 시달려야 했으나, 천도교의 기관지이자, 민족 계도지로서 입장을 분명히 취하고 있었다.
'천도교회월보'는 일반적인 천도교 교리 강론을 비롯해 남녀평등, 청년과 여성의 계몽에도 앞장섰다. 또한 천도교인들이 대부분 농민임을 감안해 현대식 농법 및 과수재배법, 양돈업, 농업기계 등에 관한 글을 자주 실었다. 대표적인 글로는 ▷과수 가접법(嫁接法) ▷삼림의 효용 ▷농양(農壤)에 시비(施肥) 방법 ▷과수원의 위치 및 토양 기후 ▷양돈학 ▷과목의 이익과 기르는 방법 ▷목축과 과수의 이익 ▷고구마와 낙화생의 이익 ▷돼지 기르는 이야기 ▷농사의 기계 발달 ▷꿀벌 기르는 이야기 등을 들 수 있다.
천도교는 조선의 근대화와 문명화를 위해 청년들의 교육을 중요한 사업으로 여겼으며, 그동안 근대적 주체로 자리잡지 못한 여성들의 계몽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천도교가 주장하는 여성 계몽의 궁극적 지향점을 남녀평등으로 보았는데, '천도교회월보' 1917년 10월호에 실린 '우리의 가정'은 그 대표적인 글이다.
"문명한 나라 사람은 남녀가 동등권이 있답니다. 여자의 지각이 남자와 같고 학문이 남자와 같고 사람 자격이 같은 고로 우리 조선 여자는 학문이 없고 마땅히 행할 의무를 알지 못하고 책임도 알지 못하여 사람 자격이 없는 고로 권리도 동등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여자의 의무는 의무대로 복종하고 여자의 책임은 책임대로 부담하여 자격있는 사람 권리있는 사람이 되어 남녀동등의 대접을 받아 봅시다."
현재 영남대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도교회월보' 26권은 이 잡지의 영인본(천도교중앙총부·1976)이다. 천도교회월보는 많은 내용이 국한문 혼용이거나 한문 논설형태로 돼 있어 아직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선조의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 의지를 표방하고 있는 자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이태우 연구교수(영남대 독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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