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우린다. 교수님을 추억하는 데 차가 빠지면 섭섭하다. 신광현 교수님의 연구실에는 늘 차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학생이 찾아가면 하던 일을 제쳐두고 찻물부터 끓이셨다.
"꽃이 한 송이 떠 있구나. 아름답지 않니?"
찻잔에 꽃이 만개하면 시간이 멈춘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책상 위에는 책 두 권과 짧은 글 두 편, 그리고 대학 시절 내가 쓴 문학 비평문들이 놓여 있다. 2011년 교수님이 돌아가신 뒤 출간된 유고집과 추모문집, 그리고 교수님 수업을 들으며 내가 쓴 글이다.
스무 살 때 쓴 글을 펼쳐 본다. 교수님의 교정이 행간을 넘어 여백까지 가득하다. '어색한 문장'투성이에 '모호한 발언'이 난무하고, '우리말로 보기 어려운 문장'까지 적힌 졸작을 다시 펴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지간히 대명사도 자주 반복했나 보다. "'그'를 너무 좋아하는구먼"이라고 쓰신 걸 보면. 글을 놓고 연구실에서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글을 많이 안 써 본 모양이구나." 찻잔 든 손을 떠는 제자에게 교수님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글쓰기도 부지런히 배워야 해." 교수님은 기자가 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들도 처음엔 미숙했지만 배움을 통해 읽을 만한 글을 쓰게 되었단다.
가끔 청소년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친다. 빽빽하게 교정된 글을 받고 고개를 떨구는 학생에게도 교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저는 몇 학년 몇 반 누구입니다"로 시작했던 미숙한 글은 어느새 '실험용 쥐'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품을 정도로 성장한다.
유고집 "주체·언어·총체성"에는 영미문학을 다루는 교수님의 논문뿐 아니라 번역학에 관한 글과 짧은 수필도 담겨 있다. 학식이 부족한 나는 교수님의 수필만 겨우 이해한다. 남은 네 편의 수필 가운데 "'으'가 그린 세상"의 마지막 문단을 소개한다.
"우리말의 '으'가 그린 세상은 그윽한 세상이다. '가득함'은 꽉 찬 상태이다. 이것을 '그득함'으로 바꾸면 그 꽉 찬 상태에 느낌이 더해진다. 여기서 'ㄷ'마저 밀어내고 '으' 소리를 이어가면, 그득함은 '그윽함'으로 바뀐다. 그윽함은 꽉 채울 수 없음이다. 채움의 경계에서 노닐며 한없이 그 경계를 늘리려는 말이다. 그윽함은 측량할 수도 소유할 수도 없음이다. 물감으로 가득 채워서는 형용할 수 없는 '들'의 그윽함, 아무리 아름다운 가락으로도 잡을 수 없는 '늘'의 그윽함, 저 봄빛 하늘의 그윽함이다. 바로 우리말 '으'가 그린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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