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BC 사극의 부활인가.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여러모로 과거 이병훈 감독이 주도했던 퓨전사극, 그 중에서도 여성사극의 계보가 읽힌다. 역사와 상상력 사이에 아슬아슬하지만 균형감 넘치는 '옷소매 붉은 끝동'. 이 사극에 쏟아진 열광의 실체는 뭘까.
◆'이산'과는 다른 '옷소매 붉은 끝동'
MBC 금토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첫 발은 소소했다. 첫 시청률 5.7%(닐슨 코리아). 여기에는 이 사극이 정조 이산과 의빈 성씨의 로맨스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시청자들에게 이 소재는 특별할 것 없는 것이었다. 이미 2007년에 MBC가 '이산'으로 소개한 바 있는 소재가 아닌가.
당시 '이산'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서진)이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보위에 오르고도 끝없이 암살 위기에 처하는 상황으로 '궁에서의 서바이벌'을 그려냈다. 동시에 성송연(한지민)이라는 화원 출신 궁녀와의 달달한 로맨스로 큰 인기를 끈 바 있다. 최고 시청률이 35.5%를 기록할 정도였다. 물론 '이산'에서 성송연은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의빈 성씨를 모델로 하곤 있지만, 허구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인물로 그림 재주가 뛰어나 궁중 도화서에서 일을 하는 궁녀로 그려졌다.
하지만 이런 허구적 설정을 빼고 나면 배우들은 바뀌었지만 이산 정조(이준호), 의빈 성씨 성덕임(이세영), 영조(이덕화), 혜경궁 홍씨(강말금), 화완옹주(서효림) 등이 등장하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이산'과 소재적으로 다른 점은 없어 보인다. 역사가 스포일러라 이산이 마주한 갖가지 정적들과의 치열한 싸움이 이어질 것이고, 역시 역사적 사실인 의빈 성씨 성덕임과의 신분을 뛰어넘는 절절한 사랑이야기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연배우로서 캐스팅된 이준호와 이세영이라는 배우의 무게감은 '이산' 때의 이서진, 한지민보다는 다소 약하게 느껴지는 면마저 있다. 그러니 첫 시청률 5.7%는 당연해 보인다. 적은 기대감의 결과이니 말이다.

하지만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후 매회 시청률을 경신하면서 7회 만에 10.7%의 두자릿 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런 반전은 이 작품이 애초 '이산'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생각했던 선입견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먼저 성덕임이라는 캐릭터를,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잘 전하는 '스토리텔러' 혹은 '전기수'로 세워 놓았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를 연상시키는 상황들이 성덕임의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성덕임은 그 이야기 들려주는 능력으로 몇 차례 죽을 위기를 넘긴다. 예를 들어 성덕임이 어렸을 때 죽은 영빈의 상가에 왔다 우연히 만난 영조가 선물로 준 책 때문에 생긴 위기 국면에서 그가 스토리를 들려줌으로써 위기 국면을 벗어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책을 훔쳤다는 누명을 벗겨줄 유일한 인물이 영조였지만, 치매 증세로 기억이 가물한 영조에게 성덕임이 그 때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는 대목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은 '이산'의 성송연과는 달리 글씨를 잘 쓰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들려주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이런 캐릭터의 차별성은 '옷소매 붉은 끝동'이 '이산'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궁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영·정조 시대
성덕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는 능력은 그로 하여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이산을 압도하고 주도하는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그 전조는 이들이 처음 만났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죽은 영빈 자가의 조문도 하지 못하게 된 어린 이산이 홀로 숲길을 걸어 그곳을 찾아갈 때 만나게 된 어린 성덕임은 이산이 왕세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를 위로해준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게 영빈이냐고 몰아세우고 상처줬던 것이 진심이 아니라며 눈물을 흘리는 어린 이산에게 그 눈물을 '옷소매 붉은 끝동'으로 닦아주며 성덕임은 이렇게 말한다. "너무 울면 몸이 상해. 영빈 자가께서도 그런 건 원치 않으실 거야." 그리고 "영빈 자가가 죽었기 때문에 너의 이런 마음을 다 아실 거"라고 말해준다. 성덕임은 상처 가득한 이산의 마음을 감수성 가득한 '이야기'로 사로잡는 인물이다.
또 영조의 노여움을 사 좋아하는 책을 모두 빼앗긴 채 금족령에 처해진 이산을 위해 성덕임이 문밖에서 '시경'의 구절을 읽어주고, 갑자기 들이닥친 영조에 뺨까지 맞은 이산을 위해 함부로 문을 넘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저하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에서는 성덕임이 단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닌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는 궁녀라는 신분 때문에 궁에서 남자들이 갈 수 없는 공간을 자유롭게 다니며 이산을 돕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옷소매 붉은 끝동'이 보여주는 궁녀들에 대한 남다른 시선이다.

이 사극은 궁녀의 시선으로 영정조 시대를 바라본다. 이산이 보위에 오르는 걸 막으려는 제조상궁 조씨(박지영)는 마치 궁녀들을 거느린 채 궁내 정치를 움직이는 막후 실력자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가 이산의 정적으로 서게 되는 건, 사도세자 시절 무시로 죽어나간 궁녀들을 보며 '궁녀들의 운명은 자신들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다.
물론 드라마는 제조상궁 조씨를 죽은 영빈 자가와의 연적으로 그린다. 사도세자를 두고 두 사람이 대결했지만 결국 제조상궁 조씨가 밀려나게 됐다는 설정이다. 흥미로운 상상력에 궁녀들의 관점이 더해져 영·정조 시대 역사의 뒷이야기로 제시되어 있다.
실제로 '옷소매 붉은 끝동'은 그간 사극에서 거의 배경처럼 서 있기만 했던 궁녀들을 하나하나 저마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인물들로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성덕임의 동무들인 김복연(이민지), 배경희(하율리), 손영희(이은샘)는 각각 세수간나인, 침방나인, 세답방나인으로 저마다 전문 영역이 있고 나름 '소확행'을 추구하는 인물들이다.

◆실제 역사에서 찾아낸 여성서사의 위력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성덕임이라는 궁녀의 놀라운 성장스토리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이것이 실제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후궁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한 후 장장 15년의 기다림 끝에 후궁이 된 성덕임은 정조가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맞이한 승은후궁으로 정조의 후궁 중 유일한 궁인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옹주가 돌도 되기 전 사망하고 2년 뒤 아들 문효세자도 홍역으로 죽게 되면서 상심한 의빈 성씨도 34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정조는 그 상심이 너무 커 손수 묘표와 묘지명에 문장을 지어 기록으로 남겼다. 그 절절한 글에는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사랑한다' 같은 표현들이 담겼다.
최근까지 사극은 정통사극에서부터 시작해 퓨전사극을 넘어 판타지사극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사실보다는 상상력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그 역작용이 생겨나고 있다. 사극이 지워버린 역사의 무게를 어느 정도 원하는 목소리들이 생겨난 것.

'옷소매 붉은 끝동'은 그런 점에서 실제 역사지만 가장 드라마틱한 소재를 찾아내 현재적 관점에서의 여성서사로 풀어낸 작품이다. 과거 MBC 사극이라고도 불렸던 이병훈 감독의 퓨전사극(역사와 상상력이 적절히 연결된 사극)의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고, 나아가 '대장금', '이산', '동이', '선덕여왕'같은 여성 성장사극의 명맥을 잇는 작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같은 소재를 가져오면서도 지금의 시청자들의 감수성과 눈높이에 맞춘 여성서사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구현해낸 점은 왜 지금 이 사극에 대중들이 열광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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