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좋아 촌락의 번화함을 글로는 능히 기록할 수 없고, 그림으로는 능히 베껴낼 수 없다."
최두찬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표류해 중국을 체험하고 귀환한 내용을 담은 일기 '승사록'에 있는 구절로, 1818년 5월 19일 풍요로운 중국 강남의 상우현 어느 곳 풍경을 읊은 대목이다.
저자 최두찬은 임진왜란 의병장 최문병의 7대손으로 1779년 경산시 자인면 상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표류일기 '승사록'은 1917년 최두찬의 증손 최지영(崔址永)이 목판본 3권 1책으로 간행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영남대 중앙도서관 소장본을 비롯해 5종이 현재까지 전해온다. 시문(詩文)과 표류일기가 주요 내용이며, 출범→표류→귀환 구조를 띠고 있다.
그는 1817년 5월 제주 대정현감(大靜縣監)으로 부임한 장인을 방문하고 1년 뒤 육지로 나오던 중에 풍랑을 만났다. 이후 50인과 함께 16일 동안 바다에 표류하다가 다행히 어선을 만나 중국 영파부 정해현에 표착하였다. 그는 정해현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표해일기를 기록했고, 이를 접한 중국인들은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최두찬은 강남 땅 여러 선비와 교유하기에 이른다. 이는 최두찬이 한시와 필담 등에 두루 능하며 문학·역사·지리에 관한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시골 선비들의 학문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최두찬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특히 강남지역 물산의 풍부함과 건물 및 성지의 웅대함,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 모습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의 다른 곳에 체류한 기간에 비해 강남에 체류한 기간은 길지 않았음에도 이 책에는 강남에 대한 기록이 3분의 2를 차지한다. '필담창화'(筆談唱和)를 나눈 중국 문사 대다수도 이 지역 인사들이다. 이외에도 최두찬은 중국 강남의 풍속과 산천명승, 중국 선비와의 수창, 필담 문답, 가옥·의복·농사·무덤·배와 선박 등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하북(河北) 지방은 땅이 매우 척박하고 백성들은 곤궁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산둥(山東)에서 고려지(高麗紙)를 접한 일도 기록하였다. 최두찬은 고려지가 자신이 강남에서 썼던 종이보다 훨씬 재질이 우수하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천금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시로 표현하였다.
영파부 정해현 관음사에서 시작한 중국 체류는 총 116곳을 경유하고, 마침내 1818년 3월 압록강을 건너 10월 그믐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되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강남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강남정'(江南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여생을 보내다가 1821년 9월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남긴 '승사록'은 다른 표해록에 비해 낯설고 신비로운 정경을 인상적으로 그려내었을 뿐 아니라, 국적을 초월한 지식인들의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채광수 연구교수(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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