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꿀 같은 작품

권기철 화가
권기철 화가

지난주 초대받은 식사 자리에서 주인은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짐작하지 못한 것이었지만 딱히 거절할 일이 아니었다. 중년을 넘긴 그녀는 미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나, 최근 집중적인 흥미를 갖고 탄력이 붙은 상태였다. 조그만 방 책상 위에는 꽤 많은 작품이 보였고, 그를 닮은 예쁜 꽃그림들이 켄트지 위에 피어 있었다.

"저기… 작가님, 이런 그림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의 질문 방향과 달리 나는 어떤 사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 잠깐만요."

정말 보기 힘든 작품을 발견한 것이었다. '꿀 같은 작품'이었다. 피카소가 창작이 아닌 발견이 먼저라고 한 것처럼 나는 적잖은 놀라움을 감춘 채,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두 손은 이미 작품을 만지며 살피고 있었다. 주먹 크기만 한 두상 작품이었다. 그런데 흙을 붙이다 그만 둔 미완성 '소조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얘기를 하는 듯했지만, 나는 이미 두상에 정신이 팔려 다른 상상을 하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다 작품을 올려놓고 세웠다 눕혔다. 이리저리 뒤집으며 내 생각의 교란과 내키는 감정의 영역을 슬쩍슬쩍 오가고 있었다. "이건 누구 작품인가요?" 올라오는 소유욕을 무심히 억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중요하지 그건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딸이 버린 걸 주워 놓은 거예요."

오래 전에 작업을 하다가 망쳐 쓰레기통에 버린 작품이란다. 그런데 조각을 전공한 딸은 다시 주워 놓은 걸 모른다고 했다. 재미있는 얘기다.

아무튼 내가 주목한 건 미완성이고 '무작위의 작위'다. 소조두상은 흙으로 만들기를 반쯤 진행하다 반은 마무리하지 않은 상태다. 흙이 불의 세례를 받는 작품은 테라코타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불의 세계를 관통하지 못한 일종의 미숙아 상태다. 모나리자쯤 되는 건 아니지만, 얼굴을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별하기 모호하다. 단정한 표정과 더불어 두상의 비례는 정확하나 눈, 코, 입 외에는 거의 대부분 만지다 그만 둔 작품이니 그럴 만하다.

초벌구이를 하지 않아 오래된 흙이 머금었던 수분을 밀어낸 암갈색은 야릿야릿하며 여러 군데가 긁혀 있고 담담한 먹을 입힌 느낌이다. 마치 덩어리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속살을 하얗게 드러낸 상처 같다. 오른쪽 눈과 코, 입은 뚜렷하게 완성했지만, 왼쪽 눈은 새기지도 못하고 둥글게 뚝 불거져 나온 미완성의 애꾸눈이다.

아무튼 눈, 코, 입은 다분히 계획적인 작위인데 왼쪽 눈과 나머지는 무작위다. 어쩌면 대단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지나치면 그만인, 다만 하나의 흙덩어리일 뿐인데 제작하다 버린 작가의 민감한 촉수가 궁금해진다.

누구를 모델로 시작했는지, 누구를 동일시하면서 작업했는지, 시시콜콜 묻고 싶은 건 사실이다. 어느 순간, 어느 경계에서 불만의 심리적 기제가 돌출해서 흙덩어리가 휴지통으로 획하고 던져졌는지도 더더욱 궁금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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