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한창이던 1973년 7월 26일,
발굴 조사단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박정희도 목을 뺀
금관을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금관을 수습하자
마른하늘이 천둥을 치고 폭우를 쏟았습니다.
그때 그 천마총 금관이 대구에 왔습니다.
나뭇가지(3개)·사슴뿔(2개) 장식에 금실로 꿴
태초의 생명, 태아의 모습을 한 굽은 비취옥.
전시관 스피커 울림에도 파르르 떠는 황금빛 달개.
1mm의 얇은 금판이 휘지 말라고 반 타공으로
바늘땀처럼 두른 솜씨에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높이 32.5cm, 무게 1천262.6g, 금 순도 83.5%.
발굴된 신라 금관 6개 중 제일 크고 화려합니다.
그동안 금관의 비밀을 풀기 위해 고고학자부터
역사학·미술사학·민속학자까지 싹 달라붙었습니다.
금관은 1천500년 전 '왕권의 타임캡슐'이었습니다.
제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 신라는
이사금을 버리고 마립간(麻立干) 왕호를 썼습니다.
마립간은 우두머리, 신라 땅 최고 권력자란 뜻입니다.
금관은 이 시기 마립간의 상징으로 등장했습니다.
서라벌만 금관, 지방 세력엔 금동관을 쓰게 했습니다.
'나무'와 '사슴뿔' 은 하늘로 통하는 신성한 존재.
북방의 샤먼에서, 김알지 탄생 설화가 깃든 계림에서,
천신에 제사를 지내던 소도(蘇塗)의 신목(神木)에서,
학자마다 기원설이 분분하지만 의미는 하나.
신과 인간의 중간자,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랬던 금관이 서라벌에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발굴로 추정한 사용 기간은 신라 1천년 중 100여 년.
부장품인지 실용품인지 아직도 아리송합니다.
금관을 오래 연구한 함순섭 국립대구박물관장은
"금관은 관모를 장식한 행사제례용"이라 했습니다.
함 관장은 또 "금관은 신라 땅에서 창조된 것으로,
나뭇가지 형상에 따라 시원-표준-퇴화 단계를 거쳐
지증왕을 끝으로 사라진 뒤 국가체제를 갖춘 법흥왕(23대)의
율령, 불교의 금동불상 등으로 계승된 것"이라 했습니다.
'사슴뿔' 형상도 형태상 '엇가지'라고 봤습니다.
짐(왕)이 곧 법이던 금관의 시대는 아득한 옛날.
왕이 금관을 벗고도 오랜 세월 세습의 왕정시대를 지나
국민이 주인인 공화국, 대통령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수준, 민주주의 척도, 국민의 품격.
찬란한 금관을 보며 우리가 선택할 대통령을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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