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 기독교 영성학 교수

대선이 코앞이라 그런지 말이 넘쳐난다. 말은 우리 내면의 생각이나 느낌, 가치, 신념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들이 한 말은 그들의 본 모습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한 말이 또한 그들의 가치를 만들고, 정신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말은 많은데 귀기울여 들을 말이 없고, 말은 쏟아지지만 진실한 말을 찾기 힘들어 혼란스럽다.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사회적 정체성이 혼란할 정도다.

말이 우리 존재의 본질과 닿아 있다면 우리는 다시 정직을 생각하고, 성실을 고민하며, 진정성 있는 삶을 탐구해야 할 때이다. 윤리 철학이나 심리학에서 한때 화두가 되었던 낱말이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것이었다.

진정성을 대변하는 문구는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Be true to yourself) 또는 "너 자신이 되라"(Be yourself)일 것이다. 통속적인 의미에서 "너 자신이 되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면 되는 것쯤으로 생각한다. 또한 사람들은 진정한 삶을 추구한다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걱정한다. 한순간 느낀 바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진정성은 아닐 것이다.

존재의 진정성에 천착했던 '라이오넬 트릴링'(Lionel Trilling)은 진정성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사회적 맥락이 빠져 있다고 했다. 그는 진지함이 사회적 관심사라면 진정성은 전적으로 개인적 관심사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진지성(sincerity)이 진정성보다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는 인간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 아니라 헌신이라고 했다. 심지어 다니엘 벨(Daniel Bell)은 진정성을 금지되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관철될 수 있다는 과대망상적인 개념으로 봤다. 하지만 진정성은 자기를 발견하고, 자신에게 진실하려는 우리들의 이상이 담긴 개념이다.

그래서 그런지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는 오래 전에 햄릿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너 자신에게 진실하라. 그러면 밤이 오는 것처럼 너는 어느 누구에게도 거짓될 수 없다."

'너 자신이 되라'는 진정성은 비단 인간 존재의 근원을 묻는데 그치지 않는다. 예술에서 진정성은 그 작품이 원본인지 사본인지 여부를 묻는다. 역사의 진정성은 그 사건이 역사적 진실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묻는다. 전통에서 진정성은 과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내려온 것인지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무엇보다 우리 존재와 관련해서는 사기나 속임수가 아니라 믿을 만하고 참되고 고유한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정체성, '아우텐티코스'는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운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나는 나다'라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 거짓됨 없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사실 진정성은 자아를 잃어버린, 아니 자아 개념 자체를 스스로 제거해버린 오늘 우리들의 자기 찾기가 아닌가. 우리의 삶이 리허설 없이, 그리고 기준이나 표준도 없이 풍차같이 한번 둥글게 돌아가는 것일 수는 없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말들이 빙빙 돌아다니도록 놔 눈다면 우리 존재의 집은 혼란하다 못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일까. 니체는 오래전에 "본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본래 자신이 된다는 것은 산산이 부서지고 지리멸렬한 우리의 자아상을 다시 모은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찾고, 스스로의 모습으로 거짓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은 모습 그 자체로 여여(如如)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성으로 사는 게 아니겠는가.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